삶이란 생존 이상이다.

[에세이] 숨결이 바람 될 때 - 폴 칼라니티

by 오늘이

오늘의 책은 한 신경외과 의사의 암투병기를 담은 인생 회고록 <숨결이 바람 될 때>입니다.


이 후기엔 [불평 -> 반성 -> 인정 -> 불평 -> 수긍 -> 배움]

뭐 이런 날 것 그 자체의 혼란스러운 구조가 나타날 예정입니다. 이 글을 뒤죽박죽 며칠째 작성하고 있기 때문이죠.



1. 제목

숨결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호흡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것, 삶의 의미를 얘기하고

바람은 자연스러운 순환의 아름다움과 함께 시간의 흐름과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제목에서 '숨결'은 살아있는 생명을, '바람'은 꺼져가는 생명을 상징한다. 삶이 끝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제목이었다. 번역 후기에 이종인 교수는 그의 짧은 인생역정을 이렇게 해설한다.

'뇌의 기능을 그처럼 진지하게 연구했으나 결국 뇌가 암에 의해 파괴되고, 인생의 의미를 그토록 알아내려 했으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뒤에 남겨놓고 혼자 떠나야 했다.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죽음에 붙들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출처 : 경남매일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저자 폴 칼리니티는 이 시를 책의 서시(序詩)로 실었다. 그레빌 남작이라고 하면 곤고한 인간의 생존 조건을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남작은 인간이 하나의 법률(정신) 아래 태어났으나, 다른 법률(육체)에 매인 존재이며, 허영 속에서 태어났으나 허영을 금지당한 존재이며, 병든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건강하게 살아갈 것을 명령받은 모순적 존재라고 설파했다 _추천의 글 중에서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죽음을 인지하고 살고 있다 생각했다. 인생에는 죽음이라는 게 있으니, 그 사이의 시간의 가치를 깨닫고 행동하라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이런 책들도 특히 에세이에서 많이 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는 척만 하면서 살고 있단 생각도 들고..... 아무리 죽음에 관해 글을 읽고, 곁에서 직접 느낀다 하더라도 그 순간까지 우리는 절대 모르는 영역이라고 생각도 생겼다.


근데 오늘은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질문.


'왜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까?'


뭐 의미는 알겠다만..그냥 진흙 덩어리채로 살아도 되지 않나

나 지금 너무 반항적인가


저자는 이 글을 통해 죽음을 선정적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으면 인생을 즐기라고 훈계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저 죽음의 직면을 도울 뿐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진짜 진정으로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는 어떤 걸까?

이걸 이해하지 못해서 이 글이 이렇게 지저분해지나 보다..


이 독후 기록은 이렇게 지저분한 채로 냅둘 예정이다. 나중에 이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거 같다


2. 이력

폴 칼라니티 (1977년 4월 1일 ~ 2015년 3월 9일)

아버지와 삼촌, 형이 모두 의사로 일하는 인도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었고, 인생의 무의미와 고독을 뛰어넘을 무언가를 갈망했다.

그래서 그는 의사의 길이 아닌 영문학도의 길을 택했다.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


그는 치열하게 살아왔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했고,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문학과 철학, 과학과 생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그는 이 모든 학문의 교차점에 있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과 의학의 역사 및 철학 과정을 이수한 뒤 예일 의과 대학원에 진학해 의사의 길을 걸었다.




1부. 아주 건강하게 시작했다

1부에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 성장환경과 어머니의 교육열, 당시 여자친구의 영향 등 영문학과 생물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부터, 어떻게 의사가 되어 어떤 철학을 빚어왔는지에 대한 폴의 생각과 경험이 담겨 있다.


굳이 대답을 하라면 아마 작가라고 말했으리라. 하지만 솔직히 앞으로의 직업을 생각하는 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경력의 사다리를 차근차근 오르는 일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칼라니티의 꿈은 작가였다. 더구나 의사였던 아버지의 소홀했던 가정생활을 보면서, 의사는 되지 않겠다 생각했었다


단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삶의 의미와 미덕은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의 깊이와 관련이 있다. 인생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적 측면, 즉 ‘인간의 관계성’이다.
나는 열정, 갈망, 사랑 등 우리가 체험하는 삶의 언어가 신경 세포, 소화관, 심장박동의 언어와 연관되는 뭔가 복잡한 방식이 틀림없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신경외과 전공의이자 영문학도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의 관계성. 언어회로가 사고회로에, 사고회로가 신경회로에. 신경회로가 우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다 삶과 죽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 어느 학자의 이야기. ... 를 엄청 기대했다구요.....


의사인데 영문과 출신에 철학에도 관심이 많고,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야말로 문이과가 통합된, 내가 추구하는 인간적 존재의 이상향이었다. 누군가 추천사에서도, 이런 인재 양성을 위해 한국에서도 의학전문대학원을 설립했던 건데,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게 아쉽다고 적었길래 조금 더 '완벽'을 기대치로 심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기대한 정도의 깊이와 연결성은 느낄 수 없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많이 읽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생각의 한 줄 인용구 넣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물론 훌륭한 실력인 건 맞지만 아무래도 배우고 싶은 마음에 기대치가 높았다.

(이 책 이후에 김진영 철학가의 책 <이별의 푸가>도 읽었는데 <이별의 푸가> 스타일이 내가 원했던 문학과 철학과 에세이의 이상적 융합이다.)


3. 전환점 (1)


의사가 된 칼라니티는 결국 '의사'가 되었다.
의사로 지낸 짧은 시간 동안 도덕적으로 나아지기는커녕 퇴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냥 넘어가도 괜찮은 호출(수면제가 필요한 환자들)도 있고 무시할 수 없는 호출(응급실 환자의 대동맥류 파열)도 있었다 …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근무환경 속에서 적응력을 갖춘 생명체로서,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거란 걸 배제할 수는 없다. 이해도 된다. 근데도.. 이렇게 생각해 왔지만, 칼라니티가 직접 남긴 글을 보니 좀 더 많이 아쉬워졌다.


이 글에서 칼라니티의 말을 빌리자면, '엄청난 양의 단순한 서류 종이'처럼 느껴진다 한다. 그러다가 칼라니티도 업무에 적응되면서 다시 '위험과 승리로 가득한 이야기들의 조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칼라니티가 의사로서 했던 생각들이다. 환자, 보호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류 종이 취급당하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사 역시 이렇게 생각한다는 걸 직접 목격한 기분이었다.

칼라니티가 다시 '죽음'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동료의 죽음이라는 것.

그게 또 맘에 들지 않았다 난.


"가짜공감"

진짜 공감이라는 건 너무 어려운 거야. 직접 자기에게 최소한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야 사람들은 공감이라는 걸 느끼게 될 거야.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러질 않길 바라며 읽었었다. 근데, 죽음에 익숙해져 버린 의사 칼라니티가 다시 죽음의 무게를 느끼고,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기 시작한 사건이 동료의 죽음과 자신의 불치병 진단. 이 사건들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그가 초반에 운운했던 '도덕'이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거 같다.

4. 전환점(2) - 정체성 찾기


2부.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 마라

2015년 3월, 22개월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서른여섯 살에 폐암에 걸릴 확률은 0.0012퍼센트라고 한다.

그는 레지던트 기간 마지막 해, 교수직 스카우트가 물밀듯 들어오고 커리어하이를 코앞에 두고 있던 무렵, 폐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에필로그에 의하면 이 책은 '미완성'의 책이라고 한다. 끝내 출판까지 완성 짓지 못하고 폴 칼라니티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나는 내 삶의 모든 문장에서 주어가 아닌 직접 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14세기 철학에서 환자(patient)라는 단어는 그저 ‘행동의 대상’을 의미했고, 나는 딱 그런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의사였을 땐 행위의 주체이자 원인이었으나, 환자인 나는 그저 어떤 일을 당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 이 문장을 밑줄 쳤던 이유는, 이 문장보다 조금 더 앞에서는 [patient 가 "불평 없이 곤경을 견디는 자"라는 뜻]이라는 것을 굳이 언급하며, 어떤 이야기를 풀어갔었다. 근데 자신이 환자가 되고 보니 그제서야 '어떤 일을 당하는 대상'이라며 연민이 들기 시작한 것처럼 느껴졌다.



병을 앓으면서 겪게 되는 종잡을 수 없는 건 가치관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환자가 되면 자신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려고 계속 애를 쓰게 된다.
...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이 팽창한다면, 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시간은 수축될까? 분명 그렇다. 내가 보내는 하루는 엄청나게 짧아졌다. 오늘과 내일을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연히 릴스 하나를 봤다. 어느 80대 할머니가 폐암 4기 판정을 받으셨다고 한다. 근데 일주일에 2일 정도 집에 계시고 나머지는 다 밖에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신다고 하셨다. 딸은 그런 엄마가 걱정이라며 사연을 보내셨지만, 정작 본인의 생각이 너무 멋있었다. "하루를 천 년 같이 산다면, 만 년도 살다 갈 수 있는 거라고 하셨다."

'이대로 가도 좋은 나이다'라고 생각하시고, 본인은 밝고 건강한 폐암 4기라고, 염려할 거 하나 없다고 씩씩하고 멋있게 말씀하시고 다니신다 하셨다.


이 가치관이 내가 그동안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마지막 챕터의 이야기였다. 이 상황이 가능하다는 것도 어쩌면 행운일 테고, 그런 조건이 된다면 최대한 많은 것을 하고 싶을 거 같다고 생각했었다.


또 어떤 주인공은 젊은 나이에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린 아들도 있는데 시한부 3개월 판정을 받았었는데 그 당시 그 뒤로 8개월이 지났다고 했다. 이 주인공은 아들이 밖에서 자주 놀아 감기에 잘 걸리는데 본인의 몸 상태에선 작은 감기로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니, 아내와 아들과 떨어져 엄마와 함께 생활한다고 하셨다. 그러다가도 하고 싶은 걸 얘기하시는데, 아내와 함께 시간을 더 많이 보내며 손 잡고 걷기. 이런 사랑의 이야기였다.


환자들의 고통과 정신적 고통 모두 우린 알 수 없을 것 같다. 폴도 이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
나는 문득 내가 슬픔의 5단계(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를 이미 다 겪었지만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죽음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불만도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이미 준비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우울해졌다. 분명 희소식이었지만 혼란스럽고 기이할 정도로 맥이 빠졌다.


담야타 : 너 자신을 다스려라 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학부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 그날 나는 결심했다. 수술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그게 바로 나니까.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5. 가족


폴과 루시는 (내 편견을 가득 담아 표현하자면,,, ) 이 상황에서도 아이를 갖겠다 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이 결정에 대해 처음엔 엄청 이해할 수 없다 생각했고, 폴의 말투 하나하나 트집 잡으며 읽었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한 방송에서 이런 얘기가 딱 들렸다. <대놓고 두집살림>이라고 최근에 잘 보던 예능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 취지도 내용도 굉장히 좋다. 그 방송에서 제이쓴 님이 "아이가 태어나고, 그 좋아하던 취미 스쿠버다이빙을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과호흡이 오고, 죽음이 무섭게 느껴졌다고. 그 뒤로 안 한다고." 이런 얘기가 나왔다. 나는 이런 게 부모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래서 폴의 생각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 책을 읽은 뒤로 한부모가정의 삶을 좀 더 보기도 했고, 폴에 대한 루시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했고, 폴네 집안을 생각해 보며, 내가 너무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에 갇혀 살았다는 걸 반성하기도 했다. 근데 여전히,,, 폴의 말투 하나하나는 여기에 남겨볼 것이다.


폴과 루시의 이야기를 이 책에 실린 내용으로만 미루어 짐작해 보자면, 암 진단을 받기 몇 달 전, 루시는 폴에게 부부 상담을 제안할 정도로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흔히들 겪는, 설렘 가득했던 대학 시절 연애서부터 알콩달콩 신혼생활을 즐기다 마주하게 된 현실 결혼생활의 분위기인 거 같긴 한데.. 상담을 받아보자고 할 정도면 상당히 삐그덕 거렸던 거 같았다. 그러다 폴이 암진단을 받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된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뒤에 이어지는 루시의 사랑은 아직 나는 알지 못하는 감정인 것만 같다. 괜히 의심도 되고, 와.......하고 감탄도 되고..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야 둘 다 간절했지만,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시는 내게 몇 년의 시간이 더 남아 있기를 바랐지만 내 예후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남은 시간을 아버지로 보낼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최종적으로 내가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
게다가 내가 죽은 뒤 루시에게 남편도 아기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최종적인 결정은 루시가 내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그녀 혼자 아기를 키워야 할 텐데, 내 병이 악화되면 나까지 돌보느라 더 힘들 것이었다. … “그렇다 해도 아기는 멋진 선물 아니겠어?” 내가 말했다.


난 이 생각에 반대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다는 것도 아니지만, 이 경우에 최종적 판단을 폴이 내려야 한다? 는 건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 루시의 사랑이 그런 결정을 스스로 이끌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근데 폴은 본인 혼자 생각해 '견딜 수가 없다' 생각하고, 그럼에도 또 루시가 결정하라고 고집을 부렸다지만... 혼자 아이도 키우고 본인 병수발도 하면 힘들 거란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마지막에는 폴의 주장이 강했다. "그렇다 해도"........ 라니.



그렇게 루시는 임신을 했는데, 그 뒤에 아마 10주 차쯤이었나,, 임신한 후에 폴은 이런 생각이 들었음을 글로 남겼다.

그때 다시 에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찾아내야 해요.’ 신경외과의를 겸한 신경과학자로 가장 높이 날아오르려던 욕심을 버린다면,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뭘까? 아버지가 되는 것? 신경외과의가 되는 것? 후학을 가르치는 것?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서야, 그제서야, 저런 생각을 한다고? 아니 그렇다 치고, 저 때 하는 생각 중에 뭐 신경외과의가 되는 것? 후학을 가르치는 것? 뭐 이런 거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다른 생각이 와도 아무렇지 않았을 거다. 근데 이미 루시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 해놓고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라고??? 읽던 순간에 느꼈던 어이없음과 불쾌감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독후 기록이 더 질질 끌려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임신 38주 차인 루시는 낮에는 내 곁을 지키고, 밤에는 중환자실에서 몇 걸음 떨어진, 내가 예전에 사용하던 대기실로 살짝 들어가 내 상태를 계속 주시했다.

고통의 정도를 비교하는 건 아니고, 예상하고 우려했던 부분이 나오니까... 뭔가 속상하고 안타깝고 안쓰럽고 그래서.. 그랬다.

에필로그 - 루시 칼라니티

이 책 외에 루시의 인터뷰를 통해서 임신, 육아에 대한 루시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만삭의 몸으로, 갓 출산한 몸으로, 갓 태어난 아기와 시한부 남편을 챙길 수 있었을까. 사랑의 힘이란 어떤 걸까. 진짜 힘들었을 거 같은데 그 어디에도 루시의 인터뷰는 없었다. 엄마파워이자 사랑의 힘인가 진짜.


코스텔로: 그렇게 강렬한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를 갖기로 결심하셨나요?
칼라니티: 그렇게 하는 건 정말 미친 짓 같았어요. 폴은 저보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어요. 제가 "정말 힘들 거예요. 많이 아프시잖아요. 죽음과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 아기를 마주해야 한다는 게 정말 힘들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죠. 폴은 "정말 힘들게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물었어요. 우리 삶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멋진 표현이었어요. 때로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기쁨을 누릴 수 없잖아요.
코스텔로: 한편으로는 유아를, 다른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남편을 둔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두 사람 모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거든요.
칼라니티: 폴이 아플 때,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엄마가 되면서 사랑의 맹렬함을 느꼈어요. 어떤 면에서는 사랑 때문에 무적처럼 느껴졌죠.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잘될 거야." 예전에는 인생을 길처럼 생각했어요. 어딘가로 향하는 길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거라고요. 아니면 인생은 산이고, 정상에 오르는 거라고요. 하지만 지금은 인생이 순간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폴이 아플 때도 그 순간을 볼 수 있었어요. 케이디가 아기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이 사람은 나를 필요로 하고, 저 사람도 나를 필요로 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그거다."라고 생각했죠. (출처: https://stanforddaily.com/)


루시의 인터뷰에 따르면, 폴은 이 책 외에는 다른 편지나 메시지는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만 이해한다면 정말 폴은 딸에게만 말을 남긴 셈인 것 같다. 그렇게 사랑한다던 어떤 말을 남겼는지, 그의 부모형제에게는..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돌아다녔다. 그러니 더더욱 이 책에 집중을 못할 수밖에....

부모의 고통을 헤아려서 부로 쓰지 않았던 걸까. 썼는데 출판과정에서 이렇게 엮어진 걸까. 아님 버리는 걸 잘 못하는 내 성격 탓에 그들의 이야기가 쓰이지 않는 게 거슬리는 걸까. 루시는 에필로그에서 아이를 갖겠다는 결정에 폴의 가족에게서 힘을 얻었다고 기록했다. 루시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 같으면 마냥 반기지 못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읽다가,,


다 읽은 뒤에 <아침의 피아노>를 읽으며 다시 생각을 정화시키고, 루시 칼라니티의 TED 강연과 어떤 인터뷰를 찾아보면서 생각이 좀 더 바뀌었다.


내가 생각하는 상황은 그냥 내 편견이 만들어낸 상황1일 뿐이겠구나. 요즘같이 다양한 가족문화와 가족구성, 이런 사회변화에 내가 민감하게 따라가지 못했던 거구나.


루시가 TED 강연에서 했던 이야기가 좀 더 와닿았다.

2줄밖에 없는데 루시가 본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거 같다며 소개한 W.S Merwin 시,


"나에게 당신의 부재는 실가락이 바늘을 통해서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할 일은 지나간 흔적에 색을 입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시는 어린 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

함께 그 과정을 겪으면서, 또 숨기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어질 거야."


참 멋있는 엄마 같다고 생각이 들다가, 역시나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더구나 혼자 키운다는 건 정말 많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다가...(중간에 살짝,, 진짜 이 모든 게 진심이겠지? 하는 악마의 반항감이 커지기도 했지만..) 저렇게 단단하고 위대한 엄마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다면, 나의 걱정은 하등 쓸모없는 간단한 이슈처리 되지 않을까 했다.


이후 루시는 새 연인 존 리그스를 맞이했다. 존 리그스는 루시가 좋아했던 에세이 작가,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의 저자 니나 리그스의 남편이었다. 니나 리그스는 대학 글쓰기 강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였는데, 유방암 진단을 받고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저 책을 집필한 후 숨을 거뒀다. 생전에 루시와 친하게 지내며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사이였고, 그래서 유언으로 '루시와 연락을 이어가면 좋겠다'라고 남긴 덕분에 존과 루시가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며 자연스레 연인이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아 현재는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다지만, 먼 한국 땅에서 루시에게 응원의 문구를 보내주고 싶었다.


왜냐면, 이 중요한 문장을 배웠기 때문이다.

"삶이란 생존 이상이다."
- 루시 칼라니티, TED 강연 중에서





의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설명할 때부터 기대했던 그의 도덕적 가치관이 뒤로 갈수록 나와 상이해 이 글을 읽는데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한 줄도 집중하지 못한 것만 같다. 개인의 가치관 차이와 내 편견에 갇혀 상대를 쉽게 받지 못하는 나의 편협함 때문도 있다.


책을 읽고 블로그나 서평, 기사를 찾아봤다. 지피티와의 대화 말고는 이 책에 대한 칭찬. 찬사. 교훈 밖에 읽지 못했다. 괜히.. 양식에 대한 칭찬같이 느껴졌다. 의사이자 환자라는 차별성과 죽음을 앞두고 이 기록을 남겼다는 철학적 사고가 담겼을 거란 형식과 그의 이력에서 짐작될 그의 지적 능력 등. (지피티는 나 오구오구 해주기 바쁘다 ㅋㅋㅋㅋ)


다들 글이라서 그런 건지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진짜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고...? 금실....? 도덕??

삐딱한 시선으로 책을 봤더니 나 혼자 피로하다. 물론, 본인의 실력으로 더구나 환자의 생명을 위해 그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으니 칭송받아야 마땅하긴 하지만, 내겐 이해할 수 없고, 불편한 사람인데... 하다가


근데 이렇게 타인을 내 시선으로 평가해도 되나? 하며 내 평가질을 반성했다가도, 이해는커녕 받아들이지도 못했었다.


++ 마지막으로... 이 글을 정리하며 드라마 <금월여가>를 보고 있었는데, 이런 대사가 나왔다. 판단하지 말라네..... ㅎ


"우리 둘 다 이 속세의 티끌 같은 존재야. 세월은 쏜살같고, 남을 판단할 이유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