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존중이 필요하다는 반려견들

by 오늘

반려견을 존중하는 것과 반려견을 사랑만 하는 것은 다르다는 메시지를 여러 글에 걸쳐 전하고 있어요. 사랑은 반려견을 가족으로 맞이할 각오만 한다면 누구나 반려견에게 줄 수 있고, 보호자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반려견을 대하는 매순간순간의 말과 행동에 담기지요. 반려견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진 사람의 반려견만 아니라면 어떤 반려견이든 보호자의 사랑을 가득 받으며 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존중은 반려견에 대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고, 존중을 위해서는 내 사랑만 있다면 반려견과 나 사이에는 문제없을 거라는 오판을 자각해야 하며, 우리 반려견만큼은 사랑만 줘도 문제없을 거라는 사연 깊은 합리화까지도 배제해야만 비로소 반려견을 향한 존중을 실천해 낼 수 있어요. 또, 단지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구분하여서, 알고 있기에 머무르지 않고 교육과 관리적인 노력, 공부를 하고자 하는 노력을 실천해야만 비로소 진짜 존중을 반려견에게 해줄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존중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반려문화에서 점차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으며 그 가치를 선두하고 있는 보호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될 거예요.






과거 우리나라의 개를 키우는 문화는 개를 쓰임에 따라 소유하여선 그들의 습성을 존중하기보다는 집을 지키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강했어요. 이 시기에 개를 존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사회적 분위기상 존중을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했지요. 최소한의 산책을 해주는 일도 드물었어요. 그러다 사회에는 조금의 변화가 생겨났는데, 일명 '애완견 문화'가 자기매김 하기 시작했어요. 개에게 사랑을 전하고 그들의 건강과 영양을 신경 쓰며 챙기는 분위기로 전환되었지요. 여전히 개를 소유하고 과시하는 소유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띄었으나 사람과 애완견의 감정적인 교류 흐름은 곧 있을 급진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듯했지요.

어느덧 우리나라의 동물을 키우는 문화는 반려견 문화, 즉 반려문화에 접어들었어요. 애완견 문화와 반려견 문화의 가장 큰 차이라면, 개를 말 그대로 '가족'으로써 바라보는 문화가 형성된 것, 연인이나 배우자, 절친한 지인, 부부의 자녀 등 반려견은 우리들의 수많은 '옆 자리'를 대신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사람들에게 더욱 큰 의미를 가진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어요. 이 흐름은 삭막해진 사회적 분위기로 인한 개인주의 심화, 1인 가구수 증가, 그리고 전염병 등에 의해 급살을 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추세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 사회는 반려문화가 도래했음에도 애완견과 반려견을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현재도 여전히 그 의미를 모호하게 받아들이는 시선이 있지요.

"애완견이나 반려견이나 그냥 그럴싸한 단어 하나 바꿔 의미를 키운 것뿐이잖아, 실제로 달라진 게 뭐 있나?"

이러한 인식은 특히 반려견과 함께 살아보지 않은 일부 비반려인들에게서 적극적으로 나타났지만, 사실 애완견과 반려견의 의미 구분이 모호하다는 생각은 반려인들에게도 있었어요. 애완의 완玩은 '희롱할 완'자로, 마음대로 부리며 가지고 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단지 이 완玩자에서 오는 부정적인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반려伴侶를 사용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비반려인뿐만 아니라 반려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었거든요. [애완]을 [반려]로 대체하는 것을 과도한 급진적 시도로 보는 시선이 파다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용어의 변화만 있을 뿐, 사람들은 애완견 문화든 반려견 문화든 차이를 느끼지 못했고 실제로 이렇다할 변화가 있지도 않았어요. 그저 말로써 "우리 개는 나에게 인형같은 존재가 아니라 가족이나 다름 없는 소중한 존재야"라는 말만이 들려올 뿐이었지요. 그렇다보니 저 또한 처음 반려견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엥?' 소리가 절로 나왔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너무 익숙한 단어지만요.

[반려견/반려동물]이라는 단어가 국내에 도입된 것은 국제적인 흐름에 의해서였다고 해요. 초기에는 그 변화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나타나진 않았다고 하지요. [반려견/반려동물] 용어를 처음 국내에 도입한 건 1990년이 되기도 전이지만 [반려견/반려동물] 용어가 시민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2015년에서 2020년 사이였어요. 그런데, 보편화가 더디게 진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용어의 전환 시도는 결과적으로 합리적이었어요. 세계는 점차 자연과 동물을 보존하는 등 그들에 대한 권리를 강조하고 있고 가축 관리에 대한 법률이 강화되는 만큼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가족에 대한 권리 또한 엄격해지는 변화가 나타났으니까요. 우리나라 또한 변화하는 세계의 발걸음에 맞춰 수많은 변화가 이루어져 왔고 몇몇의 사회적 이슈가 기폭제가 되어 단기간 내 많은 변화를 일구어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빠르게 변화한 탓이었는지 내면적 변화는 표면적인 변화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했어요. 반려문화는 분명 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변화는 짧은 시간 내 이루어졌어요. 앞으로도 더 많은 변화가 생겨나겠지요. 하지만 표면적인 변화에 해당하는 용어 전환, 법률적 일부 제도 개선, 사회적 관심 증대와는 달리 반려문화의 주축이자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반려견 보호자의 반려견을 대하는 태도, 실제 반려견에게 행해지고 있는 가정에서의 관리 등 내면적인 변화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아요. 여전히 애완견 문화의 것에 머물러있다고 볼 수 있어요.

현재 반려문화의 많은 반려인들은 반려견을 대하는 실질적 태도와 마음가짐은 애완견 문화의 것을 취하되, 반려견에 대한 의미만큼은 반려견 문화의 것으로 쒸우는 듯한 현상을 보이고 있어요. 이 문제는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저 '좋은 뜻만 취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려는 시도'가 아니라, 반려견을 반려견 문화에 걸맞게 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생기는 현상일테지요.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의 반려문화는 내면적인 변화를 더디게 만드는 2가지 커다란 현상을 맞닥뜨렸어요. 이 문제들은 '애완견 문화의 잔재'로, 현재까지도 우리의 내면적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지요. 하나는 반려견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 표현이 보호자가 갖출 수 있는 가장 최상의 태도라 여기게 된 현상, 또 다른 하나는 반려견이 어떠한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나와 살게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 여기게 된 현상이었어요. 안타깝게도 두 현상에서 이야기하는 보호자의 태도들은 개의 습성에 대한 존중이 없는 태도이자 보호자와의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태도들이에요. 개의 습성과 보호자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인 사랑을 개에게 주는 것, 이는 전형적인 애완견 문화시절 견주가 애완견을 대하던 태도와 닮아있지요.

우리나라는 현재 진정한 반려문화로 거듭나기 전의 과도기로, 개를 집을 지키는 쓰임새로만 키운 시대와 개를 일종의 소유품으로서 사랑을 주기 위해서 키운 시대, 마지막으로 개에 대한 복지와 존중을 중시하며 대하는 시대가 한데 모여 있어요. 이런 과도기에는 당장 나의 이웃 김 씨의 생각과 박 씨의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각자의 생각이 더 현명하다며 나에게 그 생각을 강요할 수 있어요. 심지어 불행히도 이 '내 주변 사람들의 생각들'에는 가까운 이웃들의 생각만 있는 게 아니에요. 스마트폰 하나만 있다면 접할 수 있는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댓글, 수많은 동영상, 글, TV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생각, 동물권 단체의 생각까지, '내 주변 사람들의 생각들'에는 수많은 입장과 견해가 넘쳐나고 있지요. 그런 와중에 보호자는 빠르게 그 넘쳐나는 생각들 사이에서 무엇이 더 현명하고 더 그럴싸하고 더 나에게 맞는 생각인지 골라 '내 생각'을 정립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어요. 이제 막 반려견을 가족으로 데려온 신입보호자의 입장에선 어떤 정보든 빨리 수집해 당장 반려견과의 오늘, 내일에 적용해야 할테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입보호자는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 어떤 정보가 반려견 문화에 걸맞은 정보인지 제대로 구분할 눈과 판단력이 없어요. 그래서 반려견 보호자는 우선 가장 실천하기 쉬운 정보들을 건져내요. 그런 다음 우리 반려견을 못 살게 굴지는 않을 것 같은 정보를 건져내고, 거기에 더해 얼핏 보기에 우리 반려견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정보를 건져내서 우선적으로 '내 생각'으로 만들어요. 이런 복잡하고 정신없는 과정을 거쳐 정립된 신입보호자의 '내 생각'에는 반려견 문화에 걸맞게 반려견을 대할 능력을 갖추게 해 줄 지식이나 교육적 정보보다는 실천하기 수월해 보여 건진 정보, 문제행동 예방에 도움이 되길 기대하며 건진 정보, 거기에 반려견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기대하며 건진 정보 조금'이 채워져 있게 되지요.

이런 흐름은 교육이수 의무화와 같은 제도가 자리 잡히거나 시민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보호자 교육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지 않는 한 불가피해요. 즉 반려견 보호자가 스스로 '반려견을 반려견 문화에 걸맞게 대할 능력'을 갖추길 기대하고 종용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어요.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게 되는 문화적 분위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반려견을 가족으로 데려올 수 있는 접근성과 절차, 반려견 보호자가 되고 나서야 공부와 준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구조. 이런 현실 속에서 아무리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다 한들 과도기의 긴장감을 더 고조시킬 뿐, 나아지는 데에는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도 끼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나와 다른 가치를 지향한다 해서 다른 반려인을 질타해선 안 돼요. 법을 위반하고 반려견을 학대하는 자가 아니라면요.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내가 지니고 있는 가치가 정말 최선인지, 내가 옳다고 여긴 것 위에 더 큰 가치가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며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내 생각'안의 내용물을 더 나은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지요.





우리네 반려견 보호자의 대부분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채 반려견과 살아가고 있어요. 그들의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며 더 나아지도록 돕기 위해 어떤 노력이 지속되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보아야 해요. 그러나 이런 느긋한 이야기는 '사람이 사람의 사회를 대하는 방식'에 국한되는 이야기일 뿐, 보호자님들은 가능한 빠르게 잘못 끼워진 단추를 풀어 다시 끼워넣기 위한 노력을 실천해 내야 해요. 왜냐하면 잘못된 단추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보호자가 아니라 옆에 있는 반려견이기 때문이에요.

당장 나와 다른 종인 개라는 가족을 위해 그들의 언어에 대해 공부하는 건 필수여야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보호자의 수는 매우 적어요. 어릴 때부터 개를 와봐서 얼핏 보고 들으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함에 의존하고 개의 행동에 사람의 의도를 끼워 맞춘 잘못된 해석이 군데군데 난무하지만, 잘못 끼워진 첫 단추의 영향을 간과한 많은 보호자들은 유행어처럼 "우리 반려견이 갑자기 이상해졌어요."라는 말을 하곤 해요. 반려견의 언어를 모르니 사람은 오역을 하게 되지요. 수영장 물 속에서 살려달라고 허우적하는 반려견의 몸짓은 어느새 '거봐, 개는 안 배워도 수영할 줄 안다니까"라거나 "구명조끼를 입었으니 괜찮아"라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고, 더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려 최대한 많은 공기를 들이마시려 하는 헐떡임은 "기분이 좋나 봐 해맑게 웃어!"로 번역되곤 하는 것이 현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의 영향은 그들에게 꽤나 혹독한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마치 살려달라고 외치는 반려견을 향해 나도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단추를 새롭게 잘 끼우기 위해서 보호자는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 노력은 단순하지 않아요. 만병통치약처럼 기가 막히면서 단순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아요. 반려견의 바디시그널을 읽기 위해 바디랭귀지를 공부해야 하고, 반려견을 인격화하지 않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지속해야 해요. 더 안정적인 산책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보호자는 어떤 태도로 반려견을 대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반려견이 세상을 오해하지 않게 도와야 하지요. 나의 다양한 행동들이 반려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고민해보아야 해요. 우리 반려견의 성향을 파악해 어떤 걸 조심해야 하는지, 어떤 걸 더 해줘야 하는지 등 많은 걸 공부하고 세심한 노력을 실천해 내야 하지요. 노력들 중 가장 어려운 것은 내 사랑이 반려견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를 바꿔내야 한다는 거예요. 이런 다양한 노력을 잘 실천 해내기 위해서는 세미나를 듣거나 교육 클래스를 들어보는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몰라요. 이 과정에서 시간과 돈은 물론 애써 체력까지 들여야 하겠지요.






반려견을 [존중]하는 길은 녹록지 않을 거예요. 당장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반려견 보호자라면 이런 위기감부터 느낄 거예요. '일을 하고 여가시간을 보내면서 동시에 저만한 노력을 할 자신은 없는데...'

[존중]은 완벽할 수 없어요. 꼭 반려견을 위해 내 삶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당장 우리 반려견의 행동을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면, 우리 반려견에게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관리를 해주고 있었다면 그걸 돌이켜보고 깨닫고 스스로를 아주 조금 개선해보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존중이 될 수 있어요. 그렇게 첫 존중은 둘이 되어 셋이 될 테고, 그렇게 된다면 어느새 우리는 '내가 지금 하려는 이건 반려견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는 건가?' 스스로 점검을 위해 고민하는 자신을 맞닥뜨리게 될 거예요. 이 자그마한 변화는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사랑을 존중으로 변형하기 위해 어떤 걸 해야 할지 스스로 알아보고 실천하게 만들겠지요. 그러다 보면 내 삶을 쏟지 않아도 되는 나와 우리 반려견의 존중 적정선을 찾아 유지하게 될 겁니다. 저 또한 그 선에 맞춰 두부와의 생활을 해내고 있고 제 주변에도 그 존중 적정선을 찾아 알맞은 노력을 지속하고 계신 분들이 있어요.

제가 쓰는 글은 보호자님들이 읽기만 해도 존중의 필요성을 느껴 처음 잘못 끼웠던 단추를 비로소 풀어낼 용기를 얻게 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가능하다면 첫 존중의 방아쇠로서 작용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있어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에요.

여러분들의 반려견은 사랑받고 있을 테지만, 존중까지 받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 순간이 되면 그들은 지금보다 더 밝고 행복한 모습으로 우리 옆을 지켜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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