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개만 먹으면 안 되는데?"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by 오늘

이번 글은 기존 발행 중이던 [반려견 존중]에 관한 글이 아닙니다.

반려견 존중에 관해 쓰는 글은 여전히 부족함이 많지만 나름 만족스럽게 쓰였을 때 글을 발행하고 있어요. 이번 주에는 만족스러운 글이 없어 제목의 주제로 글을 대체하여 생각을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다소 부담스러운 주제이지만 읽어봐 주시기를 바라봅니다. 댓글을 통해 다른 의견을 남겨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대화, 칼럼과 기사, 상업의 행태, 법이 대하는 방식 등을 들여다보며 [개 식용]이라는 주제에 대해 십 수년을 고민하며 살아왔어요. 물론, 이 고민을 풀어내겠다며 인생을 통째로 쏟아부은 것은 아니에요. 환경오염과 점차 녹아가는 북극, 미세플라스틱이 세상을 뒤덮고 미세먼지가 우리의 기관지를 좀먹고 있다는 것에 대해 여느 사람들이 그러하듯 걱정하지만, 저 또한 당장 살아갈 나의 하루하루에 묻혀 그것들을 생각 깊은 곳에 묻고 살아가요. 제게 [개 식용] 문제는 직업윤리와도 연관되어 있어 좀 더 가까운 논제지만, 나의 입장을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쉽사리 결론 지을 수 없어 긴 시간 동안 생각 속에 묻고 띄엄띄엄 고민을 하며 답을 찾아가던 논제였어요.


그러다 한날 제 생각을 크게 뒤집고 제 나름의 답을 내게 만든 결정적인 접근을 하게 됐어요.

[개 식용] 문제는 상업적으로, 윤리적으로, 입장차이로 얽히고설킨 문제였어요. 27년 2월부터 개를 도축하거나 개를 식용으로 판매하거나 먹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처벌대상이 돼요. 현재는 시행유예 기간에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개 식용]에 대해 굳이 스스로 자문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이를 타인에게 공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수 있어요. 이미 법은 정해졌고, [개 식용]은 어찌 되었든 애초에 주류의 식문화가 아니었으니 자연스레 사라지는 수순을 밟는 것뿐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글을 통해 생각을 공유하는 이유는, 이 담론이 [개 식용] 문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 식용]을 즐기지 않아요. 그러나 의아하게도 사람들 중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아요. [개 식용을 법으로 금지해? 왜? 왜 개만 먹으면 안 되는데?].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쉽사리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듯 의문을 가져요. 저 또한 반려견을 사랑하지만 이런 의문을 가졌던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이 의문은 개와 함께 살아보지 않은 사람, 개를 먹어본 적도 없는 사람, 개를 앞으로도 먹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나타났어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내가 먹지는 않을 거지만, 먹는 사람을 뭐라고 할 수는 없고 그걸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야'라는 입장을 보였어요. 실제로 제 주변 반려견 보호자분들도 저와 함께 이런 입장에 공감하며 함께 했었지요.

저는 의아했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네? 왜 반려견을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개 식용]을 금지해선 안 된다는 입장에 서있는 걸까?'. 사람들의 이 아이러니한 입장과 제가 가진 의문이 결정적인 접근에 이르게 만들었어요. '공평을 기준 삼아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게 아닐까?'



[죽음 인식의 결여]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먹는 동물의 죽음을 바라보지 않고도 동물을 먹을 수 있게 됐어요. 돼지, 소, 닭, 물고기 등 동물의 죽음은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 것이 됐고, 우리는 이들을 식탁에 차려질 음식 재료 중 하나정도로만 치부하게 되었어요. 저는 바로 이 점이 [개 식용] 문제를 우리가 명쾌히 해결할 수 없게 만든 원인으로 보았어요.

과거, 인간은 내가 먹을 고기를 나 또는 내 옆사람, 내가 사는 마을의 누군가가 도축하는 환경에서 살았어요. 인간은 그 고기가 식량으로서 절실했고, 절실한 만큼 죽는 동물에 대한 연민, 감수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래전부터 세상에 없는 존재를 상상할 수 있었던 인간은 기도, 제, 의식 등을 통해 동물의 죽음에 명복을 빌거나, 죄책감을 덜거나,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함을 올림으로써 죽음을 대했어요. 기도, 제, 의식은 맛 좋고 영양이 풍부해 내가 아사하지 않게 해주는 고기에 대한 대가였지요.

현대에 이르러 인간은 내 주변 동물의 죽음을 목도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동물을 먹기는 하지만 기도, 제, 의식을 통한 명복을 빌지 않고, 죄책감을 덜지 않아요. 종교인이 아니라면 일용할 음식에 대한 감사함 또한 표현하지 않지요. 명복을 빌지 않고 죄책감을 덜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것. 인간들은 그것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기 시작됐어요. 동물의 죽음을 '나와는 상관없는 무언가'정도로 치부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우리는 동물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면서 고기가 동물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그것에 대한 도리'를 저버렸어요. 도리를 잃은 인간은 공평이라는 잣대에 맞추기 위해 위험한 발상을 내보일 수 있게 되었어요.


얼마 전 읽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전 세계의 8%의 인구가 식량 부족 문제를 겪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20% 인구가 식량 부족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접했어요. 우리나라는 이 전 세계의 8%와는 달리 식량 부족에 의한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나라예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채 우리는 다시 핵심 논제를 끄집어내 볼 필요가 있어요. [개 식용] 문제는 세상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에요. "저기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미 만들어져 있는 개고기를 먹을까? 아니면 그냥 폐기할까?"가 아니라, "개라는 동물을 죽여 개고기를 만들어낼까? 말까?"의 문제예요. 죽음 인식이 결여된 우리들은 이 문제를 맞닥뜨릴 때 "개고기를 만들어내는 게 왜? 돼지고기랑 소고기랑 닭고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는데?"라는 공평을 저울에 올리려는 시도를 해요. 우리가 해내야 할 논의의 방향은 "소와 돼지와 닭이 그러고 있으니까 개도 그래야 해"가 아니라, "소와 돼지와 닭처럼 개마저도 죽음 인식 결여의 피해 명단에 올려야 할까?"예요. 우리는 정말 개를, 개가 아니더라도 족제비, 수달, 너구리를 우리의 식탁에 올려야 할까요? 공교롭게도 이 [죽음 인식의 결여]로 [개 식용] 문제에 접근하면 또다시 공평을 잣대로 문제를 바라보게 돼요. "그럼 이미 인간의 죽음 인식 결여의 피해로 대량 살상을 당하고 있는 돼지, 소, 닭은? 물고기는? 이미 피해를 보고 있는 동물이 있는데, 개는 뭐라고 여기에서 벗어나?" 이 지점에서 저는 "인간의 의식 수준이 전통사회 이전으로 퇴보하였나?" 하는 절망감을 느꼈어요.

만약 옛 전통사회의 한 부족원들에게 돼지고기와 소고기와 닭고기가 주어져 부족원들이 더 이상 동물 사냥이라는 걸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온다면 그들은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러 접근한 개를 죽였을까요? 그 개가 부락의 어린 인간을 위협하거나 사람을 해칠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면 안전을 위해 죽였을 수 있지만, 적어도 새로운 고기 식량을 위해 개를 죽이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현재 우리는 이런 안전 문제도, 식량 부족 문제도 없는 상황에서 개를 죽이는 것에 대해 '공평'을 기준 삼아 논의해요. 도리를 잃은 인간은 공평이라는 잣대에 맞추기 위해 더 많은 동물종을 죽여 식탁에 올려야 한다는 발상을 내보일 수 있게 되었어요. 현대의 인간 사회는 복잡해요. 이 사회는 개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 사회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일이 한 가정의 생계와도 직결돼요. 개인이 저마다 다른 잣대로 문제를 바라보면 국가와 현대 사회는 붕괴될 테니 '공평'은 현대 사회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좋은 도구일 거예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개 식용] 문제는 '공평'의 기준에서 벗어나 법을 통해 금지되는 수순을 밟았어요. 이는 누군가에게는 불행일 테지만 인간 전체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결핍된 게 아니라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결과라는 점에서 반갑지 않을 수 없어요. 우리나라 국민의 동물 인지 감수성 수준이 힘을 발한 결과이자 최상위 포식자라는 위치에 있는 인간에게서 동물을 무차별적으로 해치지 않고 공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엿보이게 한 결과가 된 셈인 거예요.

인간이 '공평'이라는 현대사회의 기준에 지배되지 않고, 무의식의 영역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요.






제 주변 사람들, 여러분들의 주변 사람들은 왜 개를 먹지도 않을 거고, 개를 사랑하고, 개를 먹은 적도 없지만 [개 식용]을 금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입장을 내놓을까요? 이는 개라는 동물이 일부 인간들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개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일을 막기 위한 사회적 방어기제가 발휘된 결과일지도 몰라요. '특별한 존재'는 모두에게 똑같이 특별하지 않아요. 누군가에게 개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존재일 수 있어요. '공평'이 잣대의 기준인 사회에서 '주관적 기준에 의해 일부 사람들에게만 특별한 존재인 개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근거 없이 특권을 부여하는 일'은 [사회적 부패]로 여겨질 것이 분명해요. 그래서, '개를 먹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으나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근거가 없다'라고 여긴 사람들은 '개가 사람과 친근한 동물이라서'말고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근거를 가지고 오라는 방어기제를 발휘한 거예요. "난 개를 사랑하고 개를 식용할 생각이 없지만 더 명확한 이유가 필요해. 사회적 부패에 손을 들어줄 수는 없으니까."

이 주장은, 저 또한 개를 사랑하고 개를 식용할 생각이 없으며 개를 식용한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개 식용]을 무작정 금지하라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 제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생각을 단어 하나하나로 치환하며 비로소 내뱉을 수 있게 된 결과물이에요. 아무런 학술적인, 통계적인 근거도 없지만 저는 주변의 많은 보호자님들이 낸 [개 식용]을 금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목소리가 사회적 부패에 가담하지 않기 위한 공동체 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거라 확신해요. 이는 국가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국민들의 힘이자 영향력이지요.

이 [개 식용] 문제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은 적지 않았고, 법이 발의되고 시행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어요. 끝내 하나의 동물종을 결여된 죽음 인식으로부터 지켜낸 제도 실현은 정말 큰 성과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부족함이 많아요. '공평'이 그러했듯 사회적인 구조 자체가 우리의 생각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버릴 수 있고, 자칫 잘못했다간 귀담아야 할 '무의식'이 우리에게 끼치고 있는 영향을 외면해 버릴 수 있어요. 이런 난관이 만연한 세상에서 문제를 잘 헤쳐나가기 위해선 스스로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대화를 나누며 나와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해요.




교육적 정보가 아닌 생각을 정리해 글로 다루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듯해요.

결과적으로 이 글은 3가지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공평을 기준으로는 개 식용 문제를 개인의 의식 수준에서 명쾌하게 해소할 수 없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죽음 인식의 결여가 필수적이지 않은 동물 죽임 문제공평이 기준이 되는 저울에 올려놓게 했다는 점이에요. 세 번째는 인간이 '개라는 동물에 특권을 주지 않으려는 것은 사회적 방어기제이며, 이는 인간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다는 점이었어요.

이 글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동물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이해될 수 없는 글일 거예요. 동물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왜 동물의 죽음을 굳이 인식해야 하는데? 사람의 죽음에만 민감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접근으로는 이 글을 바라볼 것이기 때문에 주장을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 위선적인 주장으로 여겨질지도 몰라요. 인간의 사회는 이토록 복잡해요. 무엇을 기준으로 놓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고, 무엇을 기준으로 놓는 사람인가에 따라 아군이 되거나 적군이 돼요. 이런 현실 속에서는 개인의 주장, 생각을 자유로이 펼쳐놓고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럼에도 제가 이 글을 써 발행하는 이유는, 스스로도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지는 못했던 '공평 속 사회적 부패에 대항하여 개를 사랑함에도 개 식용 금지는 불합리한 것'이라 여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생각을 펼쳐보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들은 '공평'보다 '죽음 인식의 결여'를 내세워 개 식용 문제를 들여다본 글의 주장에 공감하시나요? 아니면 억지스러운 주장에 지나지 않다고 느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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