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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Nov 30. 2021

아는 만큼 도시가 보이는 프리워킹투어

체코 프라하 & 폴란드 바르샤바, 프리워킹투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문에 나오는 이 문장은 정조 때 문인 유한준의 글을 변형한 것으로 축약 버전인 '아는 만큼 보인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우리가 하는 경험의 깊이와 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데, 여행할 때만큼 이를 절감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여행에서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아는' 것을 늘리는 수단으로는 가이드북, 여행 에세이, SNS 등이 있는데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을 하나 꼽자면 가이드 투어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이드 투어라는 게 워낙 종류도 다양하고 그 비용도 천차만별이지만, 어느 도시에 가든 내가 가장 선호하는 가이트 투어는 같다. (어쩌다 가끔 예외가 있을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가이드 투어계의 가성비 끝판왕 '프리워킹투어(free walking tour)'이다.


프리워킹투어는 로컬(현지인) 가이드가 약 2-3시간에 걸쳐 참여자(관광객)들과 함께 정해진 투어 루트를 도보로 이동하며 도시와 관광지에 대해 설명하는 '무료' 투어이다. 여윳돈이 넉넉지 않은 배낭여행자들에게도, 도시에 대한 로컬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열려 있는 곳(?)이다. 다만, 여기에는 약간의 숨은 비용이 있다. 원칙적으로 '프리(free)'라는 단어가 붙은 투어의 참가비는 무료인 게 맞지만 팁까지 무료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투어가 종료되면 참여자들은 투어에 대한 만족감과 가이드를 향한 고마움을 담아 가이드에게 주고픈 만큼 팁을 준다. 팁이 의무는 아니지만 일종의 암묵적 매너랄까. 물론 이 점을 감안하더라도, 프리워킹투어가 도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가장 가성비 좋은 한 방법임에는 변함이 없다.


프리워킹투어를 찾는 쉽고 간단한 방법은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와 구글에서 검색하는 것이다. 우선, 트립어드바이저에서는 특정 도시를 검색한 뒤 투어를 선택하면 다양한 투어 상품이 나온다. 투어 페이지는 한국어 지원이 되지 않으므로 투어 상품을 검색할 땐 국가 설정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해당 국가의 언어로 투어를 검색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이때 주로 미국으로 설정해놓는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는 유료 상품을 포함한 다양한 투어 정보와 함께 후기를 확인할 수 있어 투어 상품 간 비교가 용이한 것이 장점이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의 검색이 다소 번거롭게 느껴진다면 구글 검색엔진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검색창에 '○○○(도시 이름) free walking tour'라고 치면 웬만한 유명 여행지의 프리워킹투어 사이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검색되는 프리워킹투어는 보통 영어나 스페인어 등으로 진행되며 한국어로 된 투어는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이 프리워킹투어 참여를 망설이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도 그랬다. 여행 중 의사소통이 가능할 만큼 구사할 줄 아는 외국어라고는 영어가 유일한데 그나마도 유창한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영어로 진행되는 투어를 잘 따라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부담감 때문에 '프리워킹투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선뜻 참여하지 못했다.


프리워킹투어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던 중 처음으로 참여하게 됐던 프리워킹투어는 '프라하 팁투어'였다. 이 투어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프라하를 한 번이라도 다녀온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프라하의 워킹투어이다. 유럽에서는 정말 보기 드물게 프라하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진행한다. (애석하게도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투어가 중단된 상태다.) 2015년 5월, 유럽여행 중 만난 한국인 여행자와 서로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중 이 투어를 처음 알게 됐다. 내 여행의 종착지가 체코 프라하라는 말에 그녀가 프라하 팁투어를 알려주면서 꼭 한번 들어볼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던 것이다. 나 역시 프리워킹투어를 한 번쯤 들어보고 싶었던 터였기에, 비용과 언어에 대한 부담이 없는 그 투어에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프라하 팁투어는 오전, 오후 각 1회씩 다른 루트로 진행됐다. 참여 방법은 간단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나가기만 하면 됐다. 사전 예약은 필요 없었다. 오전투어는 화약탑, 시민회관, 구 시청사, 구시가 광장 등이 있는 구시가를 중심으로, 오후투어는 성 비타 성당, 황금소로 등이 있는 프라하 성 일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오전투어와 오후투어 중 하나만 참여하거나 둘 다 참여할 수 있었다. 투어 중간부터 참여하거나 그 반대로 중간에 이탈해도 상관없었다. 프리워킹투어는 비용만 'free'(무료의)한 게 아니라 순간순간의 투어 참여의사 결정 또한 'free'(자유로운)했다.


[체코 프라하] 프라하 팁투어의 오전투어 출발점이었던 화약탑과 시민회관
[체코 프라하] 다양한 건축양식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구시가 광장


이날엔 약 20-30명의 사람들이 투어에 함께 했다. 다른 사람들의 투어 후기에 비춰봤을 때, 평소에 비해 투어 인원이 특별히 많은 편은 아닌 듯했다. 두 명의 가이드는 프라하 시내 이곳저곳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며 장소장소마다에 얽힌 체코의 역사, 문화와 예술가,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체코의 근현대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의 침략, 종전 후 평화를 되찾기도 전에 시작된 공산당의 지배와 독재, 억압받은 체코슬로바키아(1918년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2개국으로 분리됐다)의 땅에 민주화를 꽃피우고자 했으나 좌절돼 버린 프라하의 봄을 지나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벨벳혁명에 이르기까지. 수난으로 점철된 체코의 근현대사는 내 모국을 떠올리게 했고 나는 프라하와 그 도시 사람들에게 낯선 동질감을 느꼈다.


프라하를 좋아하는 데에는 잔잔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 주변으로 그 도시의 사람들이 오랜 세월 세심하게 가꾸어 정성스레 지켜온 아름다운 풍경이면 충분했다. 그렇지만 그 빛나는 모습 이면의 그늘에 자리한 이야기들을 알게 됐을 땐, 나는 단순히 프라하를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 프라하를 친밀히 여기게 됐다.


[체코 프라하] 카프카의 옛집이 있는 황금소로


프라하 팁투어를 계기로 프리워킹투어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는 2년 뒤 다시 찾은 유럽에서 영어로 된 프리워킹투어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2017년 9월,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했을 때 트립어드바이저에서 프리워킹투어 하나를 찾았다. 이 역시 사전 예약은 필요 없었다. 투어 시작 시간인 오전 10시 30분에 맞춰 투어 출발점인 지그문트 3세 바자 기둥(Kolumna Zygmunta III Wazy)을 찾아갔다. 지그문트 3세는 1596년 폴란드의 수도를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옮긴 왕으로, 그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구시가의 잠코비 광장(Plac Zamkowy)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앞에는 프리워킹투어의 가이드가 노란색 우산을 들고 익명의 투어 참여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곧 투어가 시작됐다. 


[폴란드 바르샤바] 잠코비 광장에 위치한 지그문트 3세 동상
[폴란드 바르샤바] 소원의 종(The Wishing Bell)


투어는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가지고 이어지기보다는 그때그때 발길이 닿는 장소에 얽힌 이야기나 정보를 단편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인이 아닌 스웨덴인이었다는 것, 지그문트 3세 동상이 이고 있는 커다란 십자가는 그 당시 종교의 막강한 힘을 상징한다는 것, 성 요한 대성당 뒤편의 소원의 종(The Wishing Bell)에 소원을 비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는 것, 소원의 종 주변 건물들의 폭이 좁은 것은 그 당시 세법과 관계있다는 것, '바르샤바'라는 도시명은 전설에 전해져 오는 인어 '바르스'와 어부 '사바'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것,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자 최초의 노벨상 2회 수상자인 마리 퀴리는 바르샤바 출생이었으나 그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성의 대학 진학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는 것(이후 마리 퀴리는 프랑스인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여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마리 퀴리의 집안사람들이 받은 노벨상은 총 여섯 개라는 것 등에 대해 가이드는 설명했다. 프리워킹투어가 아니었다면 무심코 지나쳤을지도 모를 동상, 건물, 골목 하나하나에 이야기들이 새겨졌다. 


[폴란드 바르샤바] 리네크 스타레고 미아스타(구시가 광장)의 인어동상


바르샤바에서의 투어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영어로 된 프리워킹투어를 들은 횟수는 총 여섯 번. 첫 테이프 끊기가 어려웠을 뿐, 프리워킹투어 참여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여유로운 자세로 투어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경험을 통해, 프리워킹투어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나 액티비티에 대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저 사람들과 함께 도시 안을 걸어 다니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가이드의 말을 이해하면 됐다.


투어 내용을 얼마큼 이해할 수 있는가는 내게 있어 매번 복불복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가이드의 영어 발음과 악센트, 말의 속도 등에 따라서 투어를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졌다는 말이다. 어떤 때는 투어 내용을 80% 이상 알아들었다가도, 어떤 때는 가이드 말의 30%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껏 참여했던 모든 프리워킹투어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고 하긴 어렵지만 참여를 후회한 적은 아직 없다. 로컬 가이드의 이야기에서 어떤 도시의 새로운 면을 조금이라도 발견했다거나 그런 가능성을 시험해봤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은 도시를 사랑하게 하고 그 풍경에 담긴 이야기는 도시와 친밀하게 사귀게 한다. 이것이 내가 프리워킹투어를 통해 느낀 것이자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시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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