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외국어 코너에 갈 때마다 토익 수험서만큼이나 자주 눈에 띄던 것 중 하나는 여행회화책이다. 영어를 필두로 하여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사실, 비영어권 나라라 하더라도 웬만한 도시들에서는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다. 항상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어도 최소한 여행을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을 정도로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언어의 초보자들을 위한 여행회화책이 판매되고 있다는 건, 여행지의 언어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어떤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언어로 그 나라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같은 간단한 인사말만 건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길지 않아도 좋으니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함으로써 한 단락의 대화를 완성하는 것. 나 역시 이런 것에 대한 로망을 품은 여행자 중 한 명이었다.
2013년 12월 말에 시작된 4주간의 유럽여행을 준비하면서 했던 것 중 하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스페인어 단어를 암기한 것이었다. (당초 의도했던 것은 스페인어 공부였으나, '공부'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에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은 하찮다 못해 가소로운 수준이었다.) 4주간의 일정 중 절반 이상을 스페인에서 보낼 예정이었기에, 스페인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두면 현지인과 현지 언어로 소통할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마침 스페인어 기초회화책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어 책을 빌렸다. 친구에게 책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열심히 공부해서 스페인에서 못해도 스페인어 서너 마디는 내뱉고 와야지.'라고 다짐했건만. 스페인으로 떠나기 며칠 전까지 주말, 밤낮없이 일하느라 스페인어 공부는커녕 짐도 겨우 싸서 공항에 간 게 현실이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에도 스페인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여행가방 한쪽에 스페인어 회화책을 챙겼다. 첫 여행지인 마드리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여행 중 하루 일과를 마친 뒤 돌아온 숙소에서 틈틈이 스페인어 단어와 짧은 문장들을 외웠다. 이것도 여행 첫 주를 넘기면서는 체력이 점점 달려서 하기 힘들어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머릿속에 있는 스페인어 단어와 문장들을 드문드문 되새김질하며 여행 내내 스페인어를 말할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스페인에서 13일째, 바르셀로나에 머물던 때였다. 간단하게 저녁 먹을 만한 곳을 찾아 카탈루냐 광장 주변을 배회하던 중 팬스 앤 컴퍼니(pans&company)가 눈에 들어왔다. 팬스 앤 컴퍼니는 1991년 바르셀로나에서 설립되어 현재는 스페인 내 여러 지역에 지점을 두고 있는 패스트푸드 체인이다. 끼니도 해결하고 스페인의 패스트푸드점도 체험해볼 겸 팬스 앤 컴퍼니에 들어갔다. 팬스 앤 컴퍼니에서는 버거킹이나 맥도날드 같은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에서 많이 봐온 동그란 버거들은 물론이고 '스페인' 패스트푸드점으로서의 지역색을 담은, 보카디요(스페인식 샌드위치)를 연상케 하는 길쭉한 모양의 샌드위치들도 판매하고 있었다.
메뉴를 결정하고 주문하려는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주문을 스페인어로 해봐야겠다! 거듭해서 서버와 상호작용하는 레스토랑과 달리 패스트푸드점에서는 메뉴 이름과 수량을 말하고 계산하면 한 끼 식사 구입에 필요한 모든 대화가 끝이 난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스페인어 대화를 시도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아마도 이때 내 머릿속에는 'numero #(#번) uno(하나), por favor(부탁합니다)'와 같이 짧은 단어들을 나열한 문장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 문장이 문법에 맞는지 아닌지 몰라도 내 의사는 확실하게 전달할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대화 시뮬레이션을 두어 차례 돌려본 뒤, 계산대로 가서 호기롭게 카운터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Hola!" (안녕하세요!)
이 인사말 다음에 어떤 말을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내 말을 들은 직원의 표정에 별 다른 변화가 일지 않는 것을 보고 내 뜻이 무난하게 전달됐음을 짐작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낸 소리가 말소리가 되긴 했나 보네. 그렇게 안도감을 느낀 것도 아주 잠시, 뒤이은 직원의 말에 나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시나리오대로라면 계산을 할 타이밍에, 직원의 입에서 전혀 예상 못한 긴 길이의 스페인어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뭔 뜻인지는 전혀 몰라도, 적어도 계산하란 말이 아니란 건 눈치로라도 알 수 있었다.
물건을 사러 갔으니, 원하는 걸 말하고 돈만 내밀면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의 의사소통은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내 할 말만 생각하고 상대방이 할 말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 스페인에서 스페인 사람과 스페인어 대화를 완성시켜보겠다는 나의 로망은 어그러졌지만 어쨌든 주문은 마무리지어야 했다. 뜻밖의 상황이 불러온 당혹감, 창피함, 미안함을 무릅쓰고 나는 직원에게 부탁했다.
"I'm so sorry, but could you repeat it in English?" (정말 죄송하지만, 영어로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주문은 스페인어로 해놓고 영어로 말해달라는 나를 보며 그 직원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렇잖아도 사람 북적이는 가게에서 바쁜 직원 귀찮게 하는 진상 손님이 된 것 같아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직원은 웃지도, 화내지도, 짜증 내지도 않고 감정 없는 표정과 기계적인 말투로 방금 전 했던 말을 영어로 되풀이해줬다. 늘 있는, 별일 아닌 일을 대하듯 한 그 무덤덤한 반응에 무안함보다는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다. 그 행동에 나에 대한 배려가 의도돼 있었다고 딱히 생각되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내 로망 하나를 고이 접어 가슴 한 구석에 봉인시켰다. 소통에 있어서 말할 준비가 중요한 만큼, 때로는 그 이상으로 들을 준비도 중요하다는 새삼스러운 교훈과 함께 말이다.
여행을 마치고 온 후 스페인어 회화책을 하나 샀다.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스페인에 갈 땐(이것은 내 남은 인생에서 내가 꼭 일어나게 만들 일들 중 하나다) 스페인어로 소통할 준비가 좀 더 착실하게 돼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물론(?) 여행의 여흥과 함께 공부에 대한 의지도 희미해지면서 첫 번째 챕터도 채 다 넘기진 못했다. (욕심에 비해 의지가 약한 편이다.) 이 글을 쓰다보니 더 늦기 전에 책장에 묵혀놓았던 그 책을 다시 펼쳐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그래야 오랫동안 고이 접어뒀던 스페인어에 대한 로망도 다시 활짝 펼쳐볼 날이 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