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Oct 20. 2021

로컬 맛집으로 나를 이끈 말 한마디

스페인 바르셀로나, 라플라타(La Plata)

여행의 즐거움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식도락'을 누리기 위해 여행안내서나 SNS에 의지하는 방법은 대체로 실패 확률이 낮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소문난 맛집이래서 찾아간 식당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흠잡을 데 없고 테이블 위의 음식은 육안상으로나 사진상으로나 훌륭한 비주얼을 자랑하며 혀끝에서 감도는 음식 맛은 환상적인데도, 무언가 빠진 듯한 허전함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빠진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하며 주위를 돌아보니 하나같이 나와 같은 여행객들이 주변 테이블을 채우고 있다. 그 순간, 이 이름난 식당에 부족한 게 무엇인지 번뜩 깨닫는다.


당을 찾는 람들은 식당의 음식이 맛있길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식당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길 원하고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길 때때로 기대한다. 특히 여행지에서는, 그 기대감이 한층 구체적인 형태로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다. 화려하고 활기찬 관광지의 분위기로 가득 찬 유명 레스토랑도 좋지만, 때로는 내가 가는 식당이 지역 고유의 개성과 현지인들의 일상으로 채워져 있는 곳이길 바라는 것이다.


내가 여행하는 도시의 사람들이 일과 후 맥주 한 잔 하며 저시간을 보내는 곳이 어디인지, 친구들과 자주 찾는 아지트 같은 식당이 어디인지 궁금해질 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시도하는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여행 중 호스텔이나 호텔, 상점 등에서 만난 현지인들에게 가볍게 물어보는 것이다.


"당신이 친구들이랑 자주 가는 식당은 어디인가요?"

"이 근처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 어디예요?"


여행깨나 해봤다는 친구에게서 전수받은, 이 사소하지만 유용한 질문의 핵심은 '좋은(good)' 식당 대신 '좋아하는(like)' 식당을 묻는 것이다. '좋은' 식당에 대해 질문받은 현지인들은 (질문을 던진) 관광객의 입장에서 '좋은(good)', '훌륭한(great)', '유명한(famous)' 식당을 떠올릴 가능성이 높지만, '좋아하는' 식당에 대해 질문받은 현지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식당을 떠올릴 것이라는 게 친구의 지론이었다. 제법 그럴듯했다. 이 이후의 여행들에서 이 방법을 몇 차례 시도해 본 뒤, 괜찮은 로컬 식당을 찾는 꽤 유효한 방법이라고 결론 내리게 됐다.


2014년 1월. 바르셀로나 고딕 지구의 한 패션 잡화점에서 가방을 사서 나오는 길이었다. 문득 상점 직원에게 좋아하는 식당을 묻고 싶어졌다. 내향형 인간이라 이 질문을 머릿속에만 띄워놓고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일이 숱했는데, 그 순간에 나는 가게 안 유일한 손님이었고 직원의 미소가 무척이나 상냥했기에 용기를 냈다.


"당신이 친구들을 만날 때 가는 식당이 어딘가요?"


TPO를 벗어난 생뚱맞은 질문이었지만 그 직원은 정말 친절하게도, 그리고 고맙게도 내 손에 있던 지도 위에 직접 위치까지 표시해가며 식당을 소개해줬다. (요즘은 여행지에서 지도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매우 드물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손에 들린 지도는 배낭여행의 낭만이자 상징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La Plata'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고딕 지구의 숨은 보석 같은 로컬 식당이었다. 길고 짧은 골목들이 얽어져 있는 고딕지구 끝자락에 위치해 있던 빛바랜 파란 간판의 작은 식당. 기대 반, 긴장 반으로 식당에 들어서자 인상 좋은 두 명의 사장님이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평일 낮이었음에도 현지인들로 북적이고 있던 식당 안에는 활기찬 기운이 가득 했다.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다른 테이블들을 빠르게 한번 스캔한 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음식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문했다. 스페인어로 된 메뉴판을 이해하는 것보다 그 편이 확실하고 빨랐다.  잠시 후, 아마도 'La Plata'의 베스트셀러였을 토마토샐러드와 정어리튀김이 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올리브오일과 소금으로 양념한 토마토샐러드는 지중해의 풍미가 가득했고 정어리튀김은 고소하고 바삭했다. 여기에 곁들인 로즈와인은 기분 좋을 만큼의 달달함과 향긋함을 품고 있어 술이 세지 않은 내 입맛에도 잘 맞았다. 특별함이나 화려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그 자체로 나무랄 데 없이 본연의 맛에 충실한 음식들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식당 안을, 그리고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식당 카운터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청량한 색감의 지중해 타일들, 사람들 사이에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오가는 스페인어 말소리, 꾸밈없는 테이블에 올려진 소박하고 정성스러운 음식들. 'La Plata'라는 식당의 정체성을 빚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가 내게 일러주고 있었다. 이곳이 내가 실체도 모른 채 찾고자 했 바로 그 로컬 식당이라고.



고딕 지구의 상점에서 내렸던 순간의 선택은 나에게 '바르셀로나 최애식당'을 선물해주었다. 그 선택에 필요했던 약간의 충동과 용기는 그보다 훨씬 큰 만족감과 성취감으로 되돌아왔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만난 현지인들에게도 여러 차례 좋아하는 식당을 물어봤지만 그 결과가 항상 바르셀로나에서의 경험만큼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도 여행지에서 만난 현지인들에게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식당은 어디냐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세계 곳곳에 숨어 있을 또 다른 'La Plata'로 나를 안내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