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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21. 2021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믿음 혹은 착각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2019년 4월. 여느 날처럼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내 무릎 관절이 절로 펴지게 하고도 남는 뉴스가 보도됐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단 소식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Paris)은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등과 더불어 파리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건축물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서는 검색창에 '노트르담 대성당'을 치면 관련 정보가 무궁무진하게 나오니 여기에서는 이쯤 해두도록 하겠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기로 유명한 프랑스인들이다. 그 자부심의 상징인 노르트담 대성당의 중앙 첨탑이 불길에 휩싸여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노트르담의 화재 현장을 지켜보던 한 파리 시민은 '엄마를 잃은 기분'이라며 슬픔을 표현했다. 노트르담 대성당 지붕 위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두 손 모아 기도하던 프랑스인들의 표정은 참담했다.


그들이 느꼈을 충격과 상실감에 댈 것은 아니겠지만,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재장면은 나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전 세계 많은 이들이 그랬을 것처럼, 800년에 이르는 역사를 지닌 문화유산이 이토록 허망하게 파괴됐다는 사실 때문에도 그랬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노트르담 대성당 앞을 동네 슈퍼마켓 지나가듯 무심히 지나쳐버렸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2013년 12월 말, 4주 간의 일정으로 내 인생의 첫 유럽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메인무대는 스페인, 서브무대는 포르투갈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끊기 전, 여행 동선을 짜기 위해 서유럽 지도를 펼쳤는데 스페인 북쪽 지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프랑스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전 세계 여행자들이 동경하는 도시, 예술과 낭만의 도시, 이 밖에도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있는 파리가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음... 그래서 프랑스 파리가 어디라고? 지도에서 찾은 파리는 프랑스 북쪽 지방에 위치해 있었다. 스페인 여행의 종착지인 바르셀로나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는 꽤 돼 보였지만 이동이 힘들 정도 또한 아닌 것 같았다. 유럽 초행자였던 나는 유럽의 한 곳에라도 더 발자국을 찍어보고 싶은 욕심을 포기 못하고 일정 마지막에 별책부록처럼 파리를 밀어 넣었다.


파리에서의 일정은 표면적으로 2박 3일이었다. 공항 이동 시간을 빼고 나면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가 시내 여행에 온전하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하나도 제대로 보려면 며칠이 걸린다는데. 파리에서 하고픈 것들을 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내게 주어진 시간의 간극은 터무니없이 컸다. 여행 일정을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몇 가지 것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서 생각했다. 파리에 꼭 다시 올 거니까, 괜찮아.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첫 파리 여행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그렇지만 미래에 반드시 꼭 있을 두 번째 파리 여행의 예고편 정도로 생각됐다. 가벼운 마음으로 목적 없이 거리를 거닐며 바로 옆에 있는 관광명소들을 지나쳐도 크게 아쉽지 않았다. 다음에 보면 되니까. 그렇게 쉽게 지나쳐버린 관광명소에는 노트르담 대성당도 포함돼 있었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파리 시청사를 지나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 그 위대한 문화유산과의 첫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카메라 셔터 몇 번 누른 게 다였다. 그리고는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애석하게도, 그 '다음'은 내 두 번째 파리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사라져 버렸다.


작년 7월, 프랑스 정부는 노트르담 대성당 복구 방식을 둘러싼 긴 논의 끝에 노트르담 대성당을 원형대로 복구하겠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정부의 결정 전에는 성당 지붕에 공원이나 수영장을 짓는 등 현대적인 방식으로 성당을 복구하자는 제안도 있었다는데, 하마터면 세계 건축계에 유례없는 혼종이 등장할 뻔했다. 파리 시내 전체의 조화와 노트르담 대성당의 상징성을 생각했을 때, 원형을 보존하기로 한 결정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옳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타까운 한 가지는, 성당 복원이 제아무리 완벽하게 완료된다 한들 미래에 보게 될 노트르담 대성당은 2014년에 내가 지나쳤던 그 성당과 절대로 같을 수 없다는 점이다.


첫 번째 파리 여행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거리낌 없이 지나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것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오만한 착각이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건축물이나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유적은 체계적인 시스템 하에서 관리되는 만큼 최소한의 손상만 입으며 보전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항상 변치 않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니라는 걸 힘없이 무너져 내리던 노트르담의 첨탑이 깨우쳐 줬다. 인생에서 항상 기회가 열려있는 게 아니듯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 너무 당연해서 쉽게 잊게 되는 이 깨달음을 여행이 권태로워질 때마다 한 번씩 꺼내어 곱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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