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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20. 2021

4유로의 낭만

오스트리아 빈, 빈 국립 오페라 극장(Wiener Staatsoper)

5유로 미만의 돈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경험한 것 중 가장 멋진 일은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인생 첫 오페라를 관람한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오페라는 고급문화라는 인식과 비싼 비용 때문에 오페라를 관람한 적이 없었다. 물론, 오페라에 대한 내 관심이 그 모든 장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크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어쨌든 간에, 수년 전 오스트리아 빈 여행을 준비하던 중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입석 티켓이 3유로라는 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됐다. 3유로면 4천 원 남짓한 돈이었고, 소소한 관심과 호기심을 발판 삼아 오페라를 한번 경험해 보기에 부담 없는 금액이었다. 나는 빈 여행 버킷리스트에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 보기'를 추가했다.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은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극장,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과 더불어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꼽힌다. 오페라 시즌인 9월부터 다음 해 6월 사이에는 매년 300회 이상의 공연이 상연된다. 그중에는 나 같은 오페라 문외한도 제목 정도는 들어봐서 아는 '피가로의 결혼', '세비야의 이발사', '카르멘' 같은 유명 오페라들도 포함돼 있다. 비시즌인 7-8월에는 공연이 없기 때문에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극장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했던 2015년 4월에는 오페라 시즌이 한창이었다. 이전 여행지였던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를 타고 빈으로 넘어간 날의 늦은 오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을 찾았다. 빈에 도착한 첫날부터 오페라를 보러 간 데에는 예기치 못한 변수에 대비해 버킷리스트를 미리 완수하고픈 마음, 체력과 컨디션이 좋을 때 오페라 입석 관람을 해치워(?)버려야겠단 생각, 오페라 공연이 나의 취향을 저격할 경우 둘째 날과 셋째 날도 공연을 보러 가려는 계획이 작용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은 그 근방에서 그보다 눈에 띄는 건물을 찾기가 어려울 만큼 규모가 거대하고 외관이 화려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어느 면에서 봐도 도드라지지만 그중 압권은 단연 7개의 동상이 장식하고 있는 극장 정면이었다. 2층에 배치된 다섯 개의 동상은 왼쪽부터 차례로 용기(heroism)ㆍ비극(tragedy)ㆍ환상(fantasy)ㆍ희극(comedy)ㆍ사랑(love)을, 건물 제일 위쪽의 말 동상들은 에라토(연애시를 관장하는 뮤즈)의 두 말들을 상징한다. 르네상스 스타일의 아치와 발코니, 동상으로 장식된 극장 정면은 균형미를 뿜어냄과 동시에 이 건물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극장 정면의 외벽을 돌아 건물 측면으로 가니 입석 티켓 매표소가 있었다. 그 근처에는 그날그날의 공연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게시판이 있었다. (물론, 공연 정보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 홈페이지에서도 확인이 가능했다.) 이날은 이탈리아 작곡가 G. 도니체티의 오페라 '돈 파스콸레(Don Pasquale)' 공연이 저녁 7시에 있었다.



사전 예매가 가능한 좌석 티켓과 달리 입석 티켓은 당일 현장 구입만 가능했다. (지금은 빈 국립 오페라 극장 회원가입을 하면 입석도 사전 예매를 할 수 있다고 한다.) 티켓 판매 시작시간을 30분에서 1시간 정도 남기고 매표소를 찾았을 땐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우연하게도 내 바로 앞엔 나처럼 혼자 여행 온 한국인 여성이 서 있었다. 괜스레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어봤지만 상대방은 별로 대화를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두세 마디 말이 짧게 오가고 대화가 끝났다. 아쉬움보단 머쓱함이 밀려들었다. 외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 반가움에 다짜고짜 말을 걸었던 내 행동이 어쩐지 촌스러웠던 것 같아서. 그 후부터는 조용히 혼자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공연 시작을 1시간 30분 정도 앞두고 입석 티켓 판매가 시작되었다. 줄은 금방 줄어들었다. 매표소 앞에 도착했을 때, 직원이 두 가지 티켓-3유로짜리와 4유로짜리- 중 어떤 것을 원하는지 물었다. 입석에도 등급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1유로라도 비싼 자리가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겠지. 단순한 생각으로 주저 없이 4유로 티켓을 선택했다. 티켓을 손에 쥐고 '아, 이제 됐나?' 하며 한숨 돌리려는데, 직원이 공연장 안쪽으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간 곳에서는 1도 예상치 못했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모든 입석은 자유석이었는데, 이 말은 곧 먼저 자리를 맡는 사람이 임자라는 뜻이었다. 티켓을 구입한 후에는 공연장 출입이 가능했는데 이때 재빠르게 객석에 들어가 좋은 자리를 맡으려는 사람들의 눈치싸움이 만만치 않았다. 고민과 망설임은 내 자리를 무대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었으므로, 나 역시 신속한 동작으로 한눈에 가장 괜찮아 보이는 자리를 골랐다.


1층 좌석 뒤쪽 공간에 위치해 있던 4유로 입석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대와 가까웠다. 2, 3층의 웬만한 좌석보다 무대와 배우가 잘 보일 것 같았다. 입석의 각 열은 붉은색 난간으로 구분돼 있었고 각 열과 열 사이에는 크진 않지만 단차가 있었다. 각 열의 난간에는 공연 중 자막이 표시되는 작은 모니터가 달려 있어 자리를 구분하고 있었다. 각각의 자리에는 스카프나 손수건 등이 묶여 있었다. 그것은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의 입석 관객들이 자신의 자리를 '찜'해놓는 방식이었다. 자리를 찜한 후에는 공연 시작까지 1시간 정도 남은 시간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공연 시작 전에 자리로 돌아오기만 하면 됐다. 내 자리는 중간 열의 비교적 가운데 자리였다. 살짝 아쉬운 감이 있긴 해도 그만 하면 나쁘지 않았다. 자리 맡기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어 난간에 묶을만한 물건을 준비하지 못했던 나는 아쉬운 대로 입고 있던 가디건을 난간에 묶어 두었다.



시간과 수고를 들여 관람한 이날의 공연은 나쁘진 않았지만 크게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귀에 익숙한 음악이 없었고 전혀 뜻을 알 수 없었던 이탈리아어 가사가 감상에 걸림돌이 되었다. 난간에 달려 있던 모니터에서 영어 자막을 볼 수 있었지만 자막과 무대를 번갈아 보자니 시선이 분산돼 집중을 깨뜨렸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공연의 재미를 충분히 느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의 오페라 관람은 나에게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경험으로 남았다. '오페라'라는 목적 자체가 아닌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서 4유로가 선사한 낭만을 만끽했기 때문이다.


빈의 시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빈에서 가장 먼저 복구할 건물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 극장을 향한 시민들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 극장의 입석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는 동안 나는 그 사랑을 함께 느꼈다. 이 도시 사람들이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을 체험했고 그들이 자랑스러워 마지않는 문화유산을 공유했다. 이러한 경험이 남녀노소, 빈부, 국적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건 참으로 황홀한 일이었다. 이 황홀한 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물론, 약간의 유로와 더불어 상당한 양의 체력을 지불해야 한다. 이런저런 일정을 소화하는 여행 중, 오페라 입석 관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누군가에겐 상상 이상으로 고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젊음과 열정이 있어 그 고됨을 감내할 수 있다면 그 고됨 또한 낭만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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