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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20. 2021

발 호강 좀 누리고 가실게요.

일본 하코다테, 유메구리부타이(湯巡り舞台)

2017년 12월, 일본여행을 떠나면서 범한 가장 바보 같은 실수는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여행길에 오른 것이었다. 새 운동화가 내 발에 편안함을 줄지, 고통을 줄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안타깝게도 내 새 운동화는 후자에 속했다. 여행 가서 신나게 걸어 다닐 생각으로 장만한 새 운동화를 신고 다닌 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오른쪽 발등과 새끼발가락 측면에서 날카로운 것에 찔리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운동화가 길들여지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걸어 다녀야 하는 여행 중에 아픔을 참아가며 운동화를 길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 운동화를 계속 신는 게 무리라고 판단한 나는 여행 첫날 저녁, 작은 신발가게에서 세일 중이던 굽 낮은 앵클부츠를 하나 샀다. 급히 산 앵클부츠는 기특하게도, 하루에 몇 시간씩 걸어 다녀도 끄떡없을 만큼 내 발에 편하게 맞았다. 나는 여행 첫날부터 함께한 그 부츠를 신고 고베, 교토, 오사카를 거쳐 홋카이도 남단에 위치한 항구도시, 하코다테에 도착했다.


일본 홋카이도는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일본여행 루트에 홋카이도의 도시들을 포함시킨 건, 영화 '러브레터' 속 장면처럼 눈이 무지무지하게 많이 쌓인 풍경을 원 없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코다테는 이런 기대에 착실하게 부응하는 곳이었다. 앞서 거쳐왔던 도시들과 달리 어느 곳에나 하얀 눈이 눈부시게 쌓여 있었다. 근 몇 년간 그렇게 많은 눈을 본 적이 없었다. 길을 따라 늘어선 키 낮은 건물들 주변으로 크고 작은 눈더미들이 쌓여 있는 풍경에는 포근함과 낭만이 스며 있었다. 그래,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야! 내적 흥분을 만끽하며 달뜬 발걸음으로 하코다테의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하코다테에 내려앉은 눈을 나는 진정 사랑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발이 얼어버릴 듯 시렸다. 여행 첫날 이후 줄곧 신고 다녔던 앵클부츠는 두께가 얇은 봄ㆍ가을용 부츠였다. 그게 별 문제 되지 않았던 이전 도시들과 달리, 하코다테의 눈길 위에서는 그 부츠 속 발이 동상에라도 걸려버릴 것 같았. 발을 그 상태로 방치해선 안 되겠다 싶어 트램을 타고 유노카와 온센(온천)역으로 이동했다. 트램에서 내린 후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유노카와 온센이 아닌, 트램역 건너편에 위치한 족욕탕이었다.



족욕탕의 정식 명칭은 유메구리부타이(湯巡り舞台). 자동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 떡하니 위치해있어 초행에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출입문도, 매표소도 없는 유메구리부타이는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느 유료시설 못지않게 수질과 시설물이 깨끗이 관리된 듯한 인상이었다. 족탕 한 편에 설치된 장치에서는 뜨끈한 온천수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덕분에 족탕의 수온은 뜨끈하게 유지되었고 수면 위로는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유메구리부타이엔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계셨다. 약간의 멋쩍음을 무릅쓰고 그분들 곁에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을 물에 담갔다. 발이 얼어 있어서였는지 처음에는 물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다. 물에 발을 넣었다 빼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발에 와닿는 물의 온도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따끈해졌다. 얼어있던 발이 녹고 나자 몸의 나머지 부분으로 물의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그렇게 몸을 덥혀주는 물에 발 담그고 앉아 시골 정취 가득한 풍경을 보고 있으니 몸도 마음도 느긋하게 이완됐다. 여행 내내 혹사당했던 발들 좀 호강시켜 주고자 찾은 곳에서 뜻밖에 마음까지 호강해버린 것이다.



온몸에 감도는 따뜻한 기운에 나른해질 즈음, 일본인 가족이 와서 족욕탕에 자리 잡고 앉아 물속에 발을 넣었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온 당고를 주섬주섬 꺼내 나눠 먹으며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사진을 찍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이따금씩 전차가 지나가는 한산한 거리, 그 위를 듬성듬성 장식하고 있는 소복한 눈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작은 건물들은 그 순간 그들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배경이었다. 특별할 것 없지만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일본영화 같았던 그 장면을, 나는 하코다테에서 마주친 수많은 장면들 중 가장 소중히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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