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에 도착한 지 겨우 반나절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도심을 가득 채운 열기와 습기에 맞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던 나와 L은 상당히 지쳐있었다. 2016년 6월 중순의 호찌민에서는 우기가 한창이었다. 기온보다도 습도가 사람의 진을 빼놓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대기 중의 습기가 내 기도 안에 들어앉기라도 한 듯 숨을 온전히 들이고 내쉬기가 쉽지 않았다. 6월에 동남아 휴양지도 아니고 동남아 도심으로 여행 올 생각을 했다니. 날씨를 전혀 고려 않고 여행지를 선택한 대가는, 말 그대로 '숨이 턱 막히는' 더위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내는 것으로 치러야 했다.
느지막한 오후, 휴식을 취해야겠단 생각에 호텔 객실로 돌아갔다. 그대로 샤워를 하고 침대 위에 최대한 게으르게 늘어져 있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일정이 남아 있었다. 호찌민에 도착하기 전부터 기대와 설렘을 한아름 안고 기다려온 나이트 투어였다. 잠깐 동안 에어컨 바람에 열기를 식히고 복장을 가다듬은 뒤, L과 함께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저녁 6시 즈음 호텔 로비로 픽업 오기로 한 가이드들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행지의 특색이 묻어있거나 활동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땐,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라는앱을 기웃거린다. 그 안에서도 특히 투어 관련 정보를 눈여겨보는데, 이날 참여했던 나이트 투어는 이 루트로 알게 됐다. 이 투어의 콘셉트는, 호찌민의 가장 일상적인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 곳곳에 숨은 로컬 스폿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 콘셉트에 매우 충실하게, 가이드들은 헬멧과 오토바이를 가지고 시간 맞춰 등장했다.
가이드들은 각 참여자에게 1 대 1로 매칭 되었고 운전사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 덕에 오토바이를 운전하지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내 짝꿍 가이드의 영어 이름은 오렌지였다. 이름이 풍기는 상큼발랄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게 오렌지는 20대 중후반의 차분한 인상을 지닌 베트남 남자였다. 오렌지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타고 투어 시작 장소로 이동했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니, 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했던 팀들이 와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나와 L 외의 참여자로 싱가포르인 한 명과 서양인 커플이 있었던 것 같다. 가이드들까지 모두 합쳐 10명 남짓한 인원이 이날 나이트 투어의 멤버가 되었다.
걸어 다닐 땐 느긋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던 도시는 오토바이 위에서 활기차고 역동적인 인상으로 변했다. 여느 호찌민 시민들처럼 그들의 방식으로 이 도시 안을 누비고 다니는 기분은 그냥, 그리고 마냥 좋았다. 밋밋한 단어인 줄 알지만 '좋다'라는 형용사보다 그때의 기분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빠르게 달리는 오토바이 주위로 흐르는, 습기 머금은 미지근한 바람마저도 상쾌할 지경이었다.
우리가 탄 오토바이는 넓은 도로와 좁은 골목을 번갈아 내달리며 도심 내의 작은 유적지, 시장, 주택가를 거쳐 강변 공원에 다다랐다. 강변 공원은 사이공 강을 따라 길쭉하고 넓게 형성돼 있었다. 그 주변에 늘어선 건축물과 시설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사이공 강의 밤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화려하기보다는 평온한 야경이었다. 오렌지는 이곳이 호찌민의 대표적인 가족 나들이 장소이자 데이트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뒷받침하듯, 공원 이곳저곳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이공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서 그들의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지켜보았다. 잠시나마 그렇게 호찌민 사람들의 일상 안에 발을 들였다.
오토바이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만찬이 예정돼 있던 로컬 식당이었다. 우리는 식당 앞 거리 위에 차려진 낮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메뉴는 가이드들이 핫팟(hotpot)이라 부른, 베트남어 명칭은 기억나지 않는 요리였다. 샤부샤부와 비슷하게 육수에 채소와 고기를 넣어 데쳐 먹는 음식이었다. 가이드들은 국빈 대접하듯 정성스럽고 세심한 손길로 투어 참여자들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주었다. 참여자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몇몇 가이드는 베트남어로 된 노래를 불렀다. 멜로디와 가사의 의미는 생각나지 않지만, 손뼉 치며 노래를 들었던 그 순간의 흥겹고 유쾌했던 분위기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투어를 마무리하면서 '리'라는 이름의 가이드가 참여자들을 향해 'Welcome to Vietnam'이라고 외쳤다. 평범하디평범한 인사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진심과 환대가 가득했다. 그것은 그 말을 하던 리의 사랑스럽고도 환한 표정을 본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나이트 투어에서 만난 이 도시와 이 도시의 사람들이 활기차고 긍정적인 기운으로 나의 여행 에너지를 충전해주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호찌민의 대기는 여전히 덥고 습했다. 그렇지만, 여행 에너지가 만땅으로 충전된 덕분에 숨이 턱 막히는 더위도 이제는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