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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22. 2021

그 녀석의 어떤 모먼트

포르투갈 리스본, 거리의 기타리스트

모먼트(moment). '순간'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로 요즘 온라인상에서는 어떤 인물의 특정 면모가 부각되는 순간, 또는 어떤 감정이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을 묘사할 때 많이 쓰인다. 예를 들면, '감동 모먼트', '잘생김 모먼트', '입덕 모먼트(특정 대상에 깊게 빠져드는 순간을 뜻하는 말로 그 대상이 연예인인 경우가 많음)' 같은 식이다.


여행 중에도 다양한 모먼트가 있기 마련이고 그중 어떤 것들은 여행에 감미료를 치듯 흥분과 짜릿함을 더한다. 내 경우엔,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이나 통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모먼트들이 그 '어떤 것들'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들은 나 자신과 관련한 것일 때도 있고 나를 둘러싼 것들, 이를 테면 주변의 사물이나 상황, 타인 등과 관련한 것일 때도 있다.


2014년 1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가장 멋진 식사를 했던 날은 내게 7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모먼트를 선사한 날이기도 하다. 나와 J는 바이샤 지구의 로시우 광장(Praça do Rossio)에서 도보로 약 5분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레스토랑 앞쪽 거리를 향해 있던 테라스석에 자리 잡은 뒤, 포르투갈의 대표 음식 '바칼랴우 아 브라스(bacalhau a bras)'와 '카타플라나(cataplana)'를 주문했다. 바칼랴우 아 브라스는 흰살생선인 대구살을 잘게 잘라 달걀물을 입혀 볶은 음식이고 카타플라나는 걸쭉하고 매콤한 국물에 생선살, 새우, 오징어, 감자 등을 넣고 푹 끓여낸 음식이다. 두 음식 모두 입에 맞았고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종업원의 친절함도 만족스러웠지만 이날 저녁을 멋지게 만들어준 건 다름 아닌 거리에서 들려온 기타 연주였다.


그 기타 연주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다. 한창 식사를 하던 중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가 밖에서 기타 연주를, 그것도 매우 훌륭하게 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됐다. 잠깐의 두리번 끝에 찾아낸 소리의 근원은, 레스토랑 맞은편 음반 가게 앞에 앉아있던 무명의 기타리스트였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귀에 익은 팝송이나 연주곡이 아니었음에도 자꾸만 귀 기울이게 만들었다. 기타의 'ㄱ'자도 모르는 주제에, 굉장히 테크니컬하고 흡인력 있는 연주라고 생각했다. 식사 중반쯤부터 나와 J는 음식보다 음악에 더 집중하게 됐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거란 건, 차츰 잦아드는 소음 사이로 점점 선명해지는 기타 소리를 듣고 짐작할 수 있었다. 한 곡 한 곡 연주가 끝날 때마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던 것도 같다. 우리는 그날 저녁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나와 J는 기타리스트가 있는 곳으로 갔다. 멋진 음악을 들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팁을 주고 싶어서였다. 기타리스트 앞에 놓여 있던 기타 케이스에 팁을 내려놓고 옆을 돌아보는데 J가 꽤 많은 금액의 팁을 주고 있었다. 그 금액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버스커에게 팁으로 흔히 줄 법한 금액은 아니어서 살짝 놀랐던 게 생각난다. 팁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묻자 J가 답했다. 연주를 듣는 동안 너무 기분이 좋았어서 이렇게라도 감사하고 싶다고. 그 말을 듣고 나니, 방금 전 내가 내뱉었던 질문이 참으로 초라하게 느껴졌다.


서비스에 대한 만족감과 고마움의 표시로 주는 게 팁이라면 J가 준 팁의 많고 적음은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J는 기타리스트의 노고에 마음 깊이 감사했고 그 마음을 최대한 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했다. 훌륭한 기타 연주 덕분에 멋진 저녁을 보냈다는 데에는 나도 이견이 없었다. 다만 나는 그 멋진 저녁의 끝에 기타리스트에 대한 감사함보다는 그냥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더 크게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리진 않았을지 몰라도 별로 멋진 생각은 아니란 걸, J를 보면서 깨달았다.


너 오늘 쫌.. 멋지다?! 그날 J의 말을 듣고 품었던 이 생각을 입밖에 냈는지, 안 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12년 지기한테 그런 말은 오글거린다 생각해서 안 했을 것 같다. 어찌 됐든 간에, 그날 저녁 내 마음속에는 J의 '멋짐 모먼트' 하나가 추가됐다. 이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리스본에서의 모든 시간을 함께 했던 J와 이 모먼트를 다시 공유하고 싶다. 너 그때 쫌..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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