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Oct 23. 2021

이렇게까지 해서 먹어야 해

일본 교토, 야마모토멘조(山元麺蔵)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나를 기다리게 한 식당은 일본 교토의 '야마모토 멘조(山元麺蔵)'다. 많은 사람들에게 '교토 제일의 우동집'으로 불리는 야마모토멘조는 헤이안 신궁에서 도보로 약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내ㆍ외국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식당 자체가 하나의 관광지가 되었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그런 곳이다. 야마모토멘조가 이런 '초인기' 맛집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이곳을 찾아간 것에서부터 나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2017년 12월. 11박 12일의 일정으로 떠난 일본 여행 중 교토에 머물던 때였다. 헤이안 신궁을 보러 가는 길, 배가 고팠던 나는 식사를 먼저 하기 위해 가이드북에서 체크해뒀던 야마모토멘조로 향했다. 여유작작하게 걸어서 식당 근처에 다다랐을 때, 인도 위로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인가? 줄의 정체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 옆을 지났는데, 식당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곧 예감은 현실이 됐다. 줄 서 있던 이들 모두가 야마모토멘조의 우동을 맛보기 위해 나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언뜻 봐도 40-50명은 족히 돼 보였다.



평소의 나였다면 미련 한 톨 없이 발길을 돌렸을 텐데 이 날의 나는 그 시작을 헤아리기도 어려운 긴 줄의  맨 끝에 가 섰다. 야마모토멘조는 꼭 가보고 싶었던 식당 중 하나였고, 이 날이 어쩌면 이 식당의 우동을 맛볼 수 있는 내 인생의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동' 하나에 인생의 유일한 기회 어쩌고 하는 다소 오버스러울지 몰라도, 난 그만큼 먹는 거에 진심이니까.


우동은 면 요리니까 줄이 금방 줄 것이란 나의 막연한 희망과는 다르게, 줄은 야속하게도 매우 더디 줄었다. 한겨울 칼바람 부는 거리에서 덜덜 떨며 1시간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내 앞에는 긴 줄이 남아있었다. 줄을 선 것에 대한 후회는 물론이고 '이렇게까지 해서 먹어야 해?'라는 회의감마저 밀려왔지만 그때까지 쏟은 시간이 아까워 중도하차 하지도 못했다. 결국, 1시간 40분을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식당 안에 입성했고 그 후로도 대기석에 앉아 약간의 시간을 더 보냈다. '야마모토멘조'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손님들에게 테이블 착석을 허락하는 식당이 아니었다.


홀에는 4인용 테이블 2개와 8-10인용 정도 돼 보이는 일자형 테이블이 있었다. 나는 일자형 테이블에서도 주방이 정면으로 훤히 들여다 보이는 자리로 안내받았다. 길바닥에서 흘려보낸 시간을 생각하며 '이 놈의 우동 맛없기만 해 봐라' 속으로 이를 바득 갈고 있는데, 주방 직원이 손을 녹이라며 뜨끈한 물 한 잔을 내주었다. 내가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이미 세팅돼 있었던 마실 물과는 별개로 말이다. 쉽게 이를 바득 가는 것만큼이나 쉽게 감동 또한 받는 인간인지라, 그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부들부들거렸던 마음과 바들바들했던 몸이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대기하는 동안 주문해두었던 오리지널 우동은 오래지 않아 나왔다. 야마모토멘조의 대표 메뉴 중 하나인 오리지널 우동은 우엉튀김과 매운튀김우동이 함께 나오는 일종의 세트메뉴였다. 낡은 나무쟁반에 받쳐 나온 음식들은 간결하지만 맛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먼저, 우동 면발을 한 가닥 집어 먹었다. 혀와 이 끝에서 맛과 식감이 느껴지는 순간, 세 단어가 절로 터져 나왔다. Oh. My. God. 이전까지 먹었던 우동들과는 결이 다른, 우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맛이었다. 수타로 만든다는 우동면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먹는 우동면보다 조금 더 두꺼웠는데 저 세상 쫄깃함을 자랑했다. 국물은 살짝 얼큰하면서도 깊은 맛이 났으며 오랜 시간 추위 속에 있었던 몸에 온기가 돌게 했다. 국물 안에 들어있던 떡튀김과 달걀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함께 나온 우엉튀김은 겉은 바삭, 속은 아삭했다. 그냥 먹어도 맛있고 곁들여 나온 카레가루에 찍어 먹어도 맛있고 우동국물에 담가 먹어도 맛있었다. 그릇에 담겨 있던 음식들이 사라짐에 따라 기다림의 시간 동안 내 마음 속에 쌓였던 후회도 사라졌다.


어떤 것들은 시간과 인내를 쏟을 가치가 있다. 그 시간과 인내를 쏟을 땐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야마모토멘조에서의 식사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교토에 다시 가게 된다면, 야마모토멘조 식당 앞 긴 줄의 맨 끝에 가서 또 다시 줄을 설 것이다. 나의 동행자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해서 먹어야 해? 그러면 이렇게 답해줘야지. 응, 이렇게까지 해서 먹어야 해!


이전 07화 호텔 외벽의 베를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