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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24. 2021

축제는 이제 절정에 달했을 뿐

독일 뮌헨,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하얀 천과 초록 천이 교차로 수놓은 천장, 그 아래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트리 장식으로 꾸며진 무대, 무대 위쪽에 달려 있던 'PAULANER'라 적힌 푯말, 텐트 안을 가득 채운 음악과 흥겹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뮌헨의 맥주회사 파울라너의 옥토버페스트 텐트를 찾았을 때, 축제는 이미 절정이었다. 나와 일행들은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다닌 끝에 운 좋게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레더호젠(남성용 독일 전통복장)과 디른들(여성용 독일 전통복장), 편안한 캐주얼 의상 등 가지각색의 복장과 개성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 우리는 금세 녹아들었다.


잠시 음악이 멈춘 사이,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으로 숨을 고르며 다음 음악을 기다렸다. 그렇게 사람들의 흥분이 한풀 꺾인 사이, 텐트 안에 익숙한 라틴풍의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단박에 그 음악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017년 한 해를 휩쓸며 비영어권 노래 중 빌보드 역사상 최장기간 1위를 차지한 노래, Luis Fonsi의 'Despacito'였다.


사람들은 한쪽 손에 맥주잔을 쥔 채 흥겹게 춤을 췄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어우러졌고 더 이상의 자리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나 역시 오래간만에 아는 음악이 고막을 울리자 더욱 들떠서 몸을 움직였다. 옥토버페스트에서 스페인어 노래를 들으며 옆 자리의 이탈리아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으니 이곳이 지구촌이요, 이것이 위아더월드(we are the world)였다. 서로의 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시고, 그러다가 누군가의 잔에 술이 떨어지면 서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서로 소리치듯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음악 완전 신나지 않냐?"

"너 술 떨어졌다. 내 거 좀 줄까?"

"화장실 어딨는지 알아?"

"이따가 옆 텐트도 가보자."


아무리 크게 말해도 옆 사람의 말소리를 알아듣기 어려울 때가 많았기에 아마 우리의 대화 중 상당 부분은 이런 식이었을 거다. 우리는 각자의 흥에 취해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굳이 말을 통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그 순간의 분위기와 흥겨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폴라우너 텐트에서 술을 나눠마시며 함께 춤췄던 이들과는 그날 오후에 처음 만난 사이였다. 뮌헨에 도착하기 전, 여행카페를 통해 구한 동행들이었다. 독일로 교환학생 온 대학생, 짧은 휴가를 온 직장인, 러시아에서 기차여행을 시작해 며칠 전 독일에 도착한 남자, 그런 그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그의 여자친구 등 다양한 사연과 목적을 가지고 뮌헨에 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날 밤 우리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 옥토버페스트에서 기깔나게 노는 것이었다.


서로의 술을 나눠 먹다가 더 이상 나눌 술도 없어지면, 텐트 안을 바삐 돌아다니는 서버를 찾아 술을 주문했다. 술을 주문하는 데는 두 단어면 충분했다. 'Beer' 그리고 'please'. 내 경우엔 'Beer' 대신 'Radler'였다. 라들러(Radler)는 레모네이드와 맥주를 섞은 혼합주로 맥주보다 도수가 낮았다. 여러 사람에게 주문을 받아 간 서버는 1리터 잔 여러 개를 한꺼번에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귀신 같이 주문한 사람들을 찾아 술잔을 척척 넘겨주었다. '보통 머리로는 저 서버 하기 쉽지 않겠는데?' 생각했다. 서버에게 술잔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현금으로 술값을 지불해야 했다. 술값은 1리터 한 잔당 12유로. 옥토버페스트에 갈 때 현금을 두둑이(?) 챙겨가야 하는 이유였다.


저녁 8-9시쯤 절정에 달했던 축제의 열기는 9시가 넘어가면서부터 슬슬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음주가무의 민족인 한국인인 나에게, 밤 10시도 되기 전에 시들해져 버린 축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이런 마음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뮌헨에서의 일정이 끝났거나 다른 계획이 있는 두세 명을 제외한 모두가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다행히도 그 밤은 내게 뮌헨에서의 첫 번째 밤이었다.



다음 날 오후, 약속했던 이들이 맨 정신으로 다시 모였다. 밝은 햇볕 아래에서 일행들의 얼굴을 다시 마주했을 때 전날의 기억에 대한 민망함보다는 전날과 같이 흥이 폭발하는 반나절을 보낼 거란 기대감이 들었다.


우리는 먼저 현지인들이 많이 간다는 하커프쇼르(hacker pschorr) 텐트로 갔다. '하커프쇼르'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이 회사의 텐트는 옥토버페스트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 중 하나이자 인기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텐트 예약을 하지 않고 갔음에도 비교적 쉽게 테이블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축제가 한창 무르익기 전인 낮 시간에 간 덕분이었다. 이렇게 잡은 자리는 예약석만큼 위치가 좋진 않았지만 축제를 즐기기에 아무 문제없었다.


확실히 축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현지인들이 많은 텐트여서 그런지, 하커프쇼르 텐트는 옥토버페스트에서 가본 네 곳의 텐트 중 가장 활기 넘치고 들썩들썩했다. 밴드가 음악을 연주할 때 어떤 이들은 의자 위에 올라가 흥청망청 놀았다. 그러다 음악이 끝나면 언제 그렇게 놀았냐는 듯 의자에서 내려와 쉬었다. 그러면 그 잠잠해진 틈을 타 맥주 1리터 원샷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도전자는 의자 위에 올라가 1리터짜리 술잔을 들어 보인 뒤 원샷을 했고 그가 성공하면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오후 6-7시쯤 축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될 무렵, 우리는 새로운 텐트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조각칼로 정교하게 깎아놓은 듯한 달이 명하게 떠있었다. 텐트 안이 클럽이나 펍 같았다면 텐트 밖은 동심 가득한 유원지 같았다. 텐트 사이사이로 동그랗고 길쭉한 놀이기구들이 눈에 띄었다. 텐트와 놀이기구의 조명이 켜진 거리는 화려하게 빛났고 그 위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에너지가 거리에 활력를 불어넣고 있었다. 옥토버페스트가 열리고 있는 테레지엔비제(Theresienwiese)는 밤하늘만큼이나 짙어진 축제의 흥분으로 뒤덮여 있었다.


생생한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그 거리의 풍경도 언젠가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과거가 될 것이었지만 아쉬워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 밤의 축제는 이제 절정에 달했을 뿐이었다. 이번엔 어떤 모습의 옥토버페스트가 펼쳐질지 기대하며 나는 일행들과 함께 새로운 텐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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