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 나의 플럼피넛

두 번의 제주여행기

by 마음

“나에게도 플럼피넛이 필요해”


불현듯 몇 년 전 휘갈기며 쓴 일기장 속 저 문장이 떠올랐다. 그때 뚝뚝 눈물을 흘리며 썼던가, 볼펜이 닿는 자리마다 종이가 갈라질 만큼 힘주어 썼던가. 아득한 기억이다. 분명한 건, 저 문장을 썼던 곳과 떠올린 곳이 같다는 것뿐.


6년 전 그곳에서도 난 습관처럼 신문을 들췄다. 태양과 산, 바위의 아름다움을 품은 바다를 곁에 두고도 나는 손에 쥔 신문에 눈을 돌렸다. 그때 플럼피넛에 대해 알았다. 기아 상태에 있는 아이들은 기아 말기에 접어들면 아이러니하게도 식욕이 극도로 떨어져 음식 섭취를 거부한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이 유일하게 잘 먹는 것이 땅콩버터였고, 이에 착안해 만들어진 것이 플럼피넛이다. 땅콩버터에 필수 영양소를 첨가한 플럼피넛으로 시급한 영양을 보충한 뒤, 음식을 섭취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그곳의 풍경과 그곳의 냄새, 그곳의 사람들, 그곳의 소리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글을 읽고 나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저 문장을 일기장에 적었다.

“나에게도, 내 마음에도 플럼피넛이 필요한 것 아닐까”


눈앞의 아름다움마저 상처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유약해진 내 마음은 작은 감정적 변화를 알아채기는커녕 그것과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좌절감이었고, 그것은 곧 패배감, 우울감으로 자라나 나를 지배했다.


그때 무작정 제주도로 떠났다. 혼자 제주도는 처음이었다. 운전도 못 했기에 2박 3일을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아무 데나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버스 타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내달렸다가 또 걸었다. 덥지도, 쌀쌀하지도 않은 초여름 날씨의 제주도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족이, 연인이, 친구들이 예쁘게 입고, 예쁘게 웃으며, 예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의 꽃과 나무, 바다와 바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돌렸던 것 같다. 내가 늘 보던 것, 나에게 익숙한 것으로. 장소는 바뀌었지만 나는 그대로였다.


“여행이 왜 재미가 없어요?”

“그냥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잘 안 나요. 자연이 아름다운지도 잘 모르겠고요.”

사실이었다. 아무리 손에 꼽히는 절경을 봐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나는 날것 그대로의 눈부심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까 여행이 어땠냐는 물음에 화려한 수사로 표현하지 못하는 건,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 감정 매뉴얼의 부재가 곧 기억의 부재로 드러난 것뿐.


그런데 공교롭다. 너무나 공교롭게도 이들과 함께한 제주 첫날 밤, 이 질문을 받은 순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공고하기만 했던 내 마음의 둑이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그냥 웃었다.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충만했다. 여행이 사람으로 인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같은 호흡과 비슷한 리듬으로, 그 공간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 것인지. 나는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고 지금의 행복감을 잊고 싶지 않아 매 순간을 내 마음에 동기화시키고 싶었다.


아름다웠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들과의 두 번째 제주도행. 여행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다. 순간의 감탄사는 금세 휘발되고, 경탄이라고까지 할 만한 감정의 깊이가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쉬지 않고 탄복하며 혹여나 놓칠까 매일의 하루를 눈으로, 귀로 담아내느라 마음이 분주했다.


두 번째 제주도가 아름다웠던 건 찰나의 기쁨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예상치 못한 강아지와의 만남이, 눈뜨기 힘들 만큼 강렬했던 태양과 그 태양이 만들어낸 바다의 반짝임이, 시끌벅적한 바에서의 시원한 맥주와 한가로움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아득함이, 그곳에서 서핑하는 사람들의 건강함이, 무엇보다 지금 나와 같은 시간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그 모든 것이 나의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됐다.


여행 마지막 날, 끝없이 펼쳐진 바닷길을 걸으며 6년 전의 그 날을 생각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를 앞에 두고 수없이 뇌까렸던 그 말. 나의 플럼피넛.


언제나 행복은 생각지 못했던 순간 찾아온다. 나의 플럼피넛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회사에, 매달 찍히는 월급의 부피에, 사랑하는 연인의 다정함에 있는 줄 알았고, 열심히 그것들에 주파수를 맞추며 살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들에게서, 나이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모두 제각각인 이들에게서 발견하게 될 줄이야.

생각지 못한 순간이다. 이들을 통해 ‘함께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그리고 그곳에서의 ‘일상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알아갈 수 있었다. 너무 높아 누구도 건들지 못했던 나만의 둑을 툭툭 두드리는 이들, 누가 뭐래도 나의 플럼피넛.


‘행복은 밀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어떤 이의 말처럼, 우리 관계의 밀도가 아직은 낮더라도, 누구보다 가열차게 만나, 서로에 대한 애정을 품고 마음을 나누는 그 시간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이라 믿고 있다.

날토, 검발손지은, 섷, 겜보이, 우리으니 그리고 마음.

나초와춤을을 넘어 글오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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