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백의 그림자'를 읽고
지난 추석 연휴 내내 우리 가족은 함께했다. 특별한 것 없이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사진도 찍고.
비가 그치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자 아빠는 집 앞 산책을 가자고 하셨다.
산책길에서 아빠와 동생은 앞서 걷고 엄마와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걸어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우리 아빠 걸음걸이가 원래 저러셨나?' '아빠 머리도 많이 빠졌네' '저렇게 걸으시니까 신발 뒤축이 다 닳았지' 이런 생각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몇 년 전 아빠가 내 책상 위에 몰래 두고 가셨던 쪽지가 생각났다.
내가 세상의 온갖 고단함을 다 짊어지고 살고 있던 그 때다.
20대 시절 나의 그림자는 ‘뒤쳐짐’이었다.
난 늘 남들보다 한 발 늦게 선택했고 그로인해 대부분의 레이스에서 남들보다 뒤쳐졌다.
그 절정이 20대였는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뒤에 나는 하고싶은 것이 있다며 공부를 시작했다.
어떤 이는 용기가 대단하다고 했고, 어떤 이는 현실을 보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언제나 그랬듯 아빠는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항상 너의 뒤엔 아빠가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도 하셨다.
그렇게 지난한 여정이 시작됐고 인생은 늘 그렇듯 내 계획대로 흘러가주지 않았다.
하루하루 지쳐가며 용기로 포장된 나의 어리석은 선택(그 때는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에 자책하는 일이 늘어갔다. 나의 그림자는 점점 나를 향해 일어서고 있었다.
자타공인 딸 바보였던 아빠는 딸의 건강을 걱정해 아침마다 과일주스를 만들어 입 앞까지 가져다 주셨지만 나는 입맛이 없다고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차 키를 들고 서있는 것도 짜증내며 거절했다. 그때는 아빠의 그런 애정들이 부담스러웠고 나를 그냥 내버려뒀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날이 반복되던, 그 날도 세상의 온갖 짐을 혼자 다 짊어지고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어쩐지 그 날은 늘 기다려주시던 아빠도 주무시고 계셨고 나는 인사 없이 조용히 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지폐 몇 장과 쪽지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딸, 가을이 유혹하는군. 산과 들로 나오라고.
그리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라고.
딸, 힘들고 또 힘들지.
그래도 천천히 가자구나. 구경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리고 뒤도 돌아보면서.
딸, 사랑한다.]
아빠한테 손 편지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길진 않지만 아빠의 진심이 가득담긴 편지였다.
그리고 그 날 밤 참 많이도 울었던 것 같다.
그 쪽지는 아직도 지갑에 넣고 다닌다.
아빠의 편지 덕분에, 또 끝까지 기다려준 사랑 덕분에 나는 이제 그 때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늦는 것이, 또 뒤처지는 것이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받아들인 것이라고 해야할까.
오히려 조금 늦었기에, 조금 뒤에서 걷고 있기에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크고 작은 가치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그림자처럼 여겨져 괴로운 사람이 있다면 함께 뒤에서 손 잡고 걸어가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동생과 대화하며 걷고 있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또 문득 '아빠의 그림자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
아빠는 인생의 그림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이겨냈을까. 궁금했다.
앞으로 빠르게 걸어 아빠에게 팔짱을 꼈다.
“아빠 오늘 저녁에 치킨에 맥주 한 잔 어때요?”
“좋지. 지금 갈까?”
By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