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한다. 술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그 날의 대화와 그날의 분위기를. 내가 먼저 좋아했다. 20살에 처음 만난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았다.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이 언제 그렇게 무르익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목소리가 좋았고, “오빠”라는 말에 “응”이라고 대답하는 그 말투가 좋았다. 나의 눈은 늘 그를 따라다녔고, 그의 일상에 내가 겹쳐지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는 “좋아해요”라는 말 한마디 없이 날마다 그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쨍하고 술잔을 부딪쳤다. 단둘이 마주 앉아 마시는 술은 나의 마음을 더욱 예민하게 했다. 흔한 대학가의 술집은 요란한 음악을 틀어댔고, 음악의 작은 마디마디마다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들이 채워졌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고요함을 만들어냈다. 알싸한 취기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그의 눈빛과 말투 그리고 시간을 들인 그의 용기를 보며 나는 우리 사이에 놓인 테이블의 거리만큼 그의 마음 이 내 앞에 다가왔다고 느꼈다.
술과 함께하는 데이트는 언제나 즐거웠다. 왁자지껄한 술집에서도, 김치찌개가 나오는 식당 에서도,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도, 그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늘 단정한 행복이 찾아왔다. 몸은 취해도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은 흐트러짐없이 더욱 단정해졌다. 그때 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나의 20대 연애는 대부분 술과 함께했다. 술기운을 빌린 이들의 은밀한 고백을 받기도 하고, 나 또한 그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 좋냐는 질문에 술 마시며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고 늘 말해왔다.
나는 기억한다.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의 수줍은 눈빛을. 삶도, 마음도 안정되어가던 30대의 어느 날, 남자를 소개받지 않겠냐는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단, 술은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연락보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소개받으라는 말이 더욱 뜬금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 외엔 많은 것이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친구의 설득에 결국 그를 소개받기로 했다. 회사 일로 약속시간보다 한참이나 늦어버린 나를 그는 보조개 가득 패인 얼굴로 맞아줬다.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했다. 참 따듯한 사람이구나 싶었지만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불면증 때문에 잠을 잘 못 잔다는 말이 생각나서요”
두 번째 만난 날, 예쁜 캔들을 건네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나가듯 한 말이었다. 기억해달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는 기억했고 수줍은 반달눈을 한 채 나에게 말했다. 그날 그와 한 시간이 넘도록 한강을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우린 그 날 서로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음악을 자주 들으며, 어떤 계절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그가 평발이라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손을 잡고 한강을 걷는 사이가 됐다.
그에게는 그만의 중력이 있었다. 다감하고 성실한 그의 말투는 나에게 순정한 믿음을 줬다. 술이 빠진 우리의 자리에는 더 많은 대화들이 차지했다. 우리의 대화는 존대와 반말, 장난과 설렘, 재치와 유머를 넘나들며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는 늘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웅 크리고 있는 숨은 감정들을 흔들어 깨웠고, 취기와 그날의 분위기에 기댄 대화가 아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했다.
나는 기억할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할 때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오랜 시간을 지나 알았다. 술과 함께 사람과 사랑을 알아가던 20대의 나는, 모든 것에 서툴렀다. 그때의 난 연인과의 관계에서 생채기가 일어나면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스스로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마음이 그토록 술과 함께하는 시간을 기대하게 했던 것이리라.
내 마음의 흑백필터를 걷어내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사랑의 다채로움을 가리는 그 필터를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나는 걷어낼 수 있었고, 나는 나에게 더욱 솔직해질 수 있었다. 내가 그리는 사랑의 형태가 무엇인지 말이다. 나는 줄곧 사랑하는 사람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말의 덧댐 없이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오롯이 나를 통해, 지금 내 앞에 앉은 상대와도 솔직하고 즐겁게 대화하는 것이 나에게 온전한 행복을 선물해준다는 것도. 그리고 이제는 기대한다. 좋은 날씨를 기대하는 삶보다 날씨를 맞이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나의 다음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