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셀리그만 '학습된 무기력'
여기 저기 늘어놓은 빈 술병과 술이 가득 찬 술병 한 무더기를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술꾼에게 어린 왕자가 물었다.
"뭘 하고 있는 거에요?"
"술을 마시고 있지."
술꾼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술을 마시지요?"
"잊어버리려고 그런단다."
"무엇을 잊으려고요?"
어린 왕자는 술꾼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운 걸 잊기 위해서 그런단다."
술꾼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뭐가 부끄러운데요?"
어린 왕자는 술꾼을 도와주고 싶어서 자세히 물었다.
"술을 마신다는 게 부끄럽다는 거야."
이렇게 말하고는 술꾼은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난처해진 어린 왕자는 그 별을 떠나버렸다. 그는 도무지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열린책들, 2015, Chapter 12
어린 왕자는 또 다른 별에서 술꾼을 만났다. 술꾼은 침울해 보였고 그 모습을 본 어린 왕자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금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술꾼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물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부끄러움을 잊고 싶어서 마신다"는 그의 말은 겉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 부끄러움을 덮으려다 술을 마시고, 또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술을 마시는 끝없는 반복을 만들 뿐이다.
이 모습은 얼핏 보기엔 단순히 우습고 슬픈 해프닝 같지만,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자기만의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무엇인가에 물두하거나, 문제를 직시하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같은 행동을 되풀이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얼 해도 소용없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지레 포기해버리게 되는 심리 상태를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이라 불렀다. 노력해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머릿속을 채워버리면, 애써 도전하기보다는 그냥 있는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술꾼이 결국 빈 잔에 연거푸 다시 술을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셀리그만은 그 해결책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작게라도 쌓아가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작은 성공을 맛보고, 그 성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냈다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게 된다. 술꾼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자그마한 '다른 선택'의 경험일 것이다.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서' 한 걸음 내딛어보는 것. 어린 왕자가 던진 질문에 답하진 못했지만, 어쩌면 술꾼이 언젠가 그 질문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되찾는 순간이 올지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도 좋은 말도 안들릴 때가 있다. 무기력이 학습될 정도면 좋은 말보다는 사람의 따스함이 더 필요한 것 아닐까? 어린 왕자가 술꾼에게도 여우처럼 길들여졌다면, 몇 개의 질문을 던지고 답답하고 이해가 안된다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옆에 앉아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술꾼이 당장은 머금었던 말들을 천천히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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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xabay
- 생텍 쥐페리, <어린왕자>, 열린책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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