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버릴까?
그대로 둘까?
가위를 들고 화분 앞을 서성이는 시간이 늘었다.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내가 용케 죽이지 않고 키우고 있는 아펠란드라. 5년 전 길거리 트럭에서 산 2천 원짜리 화분이 이젠 제법 자라 잎을 풍성하게 내고 있다.
이렇게 해를 넘겨 식물을 키워본 것이 처음이라, 인터넷으로 물 주는 법, 분갈이하는 법, 물꽂이 하는 법 등을 공부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하나였던 화분이 3개로 늘어난 사실만으로도 ‘망손’ 레벨이 낮아지는 듯하여 뿌듯하다.
몇 번의 큰 고난(?)을 극복하고 풍성해진 아펠란드라 앞에서 오늘도 난 고민을 한다. 끝이 시들어가는 저 잎을 잘라줘야 할까? 저 잎은 앞으로 시들기만 할 텐데… 햇볕을 못 받는 위치에 있는 다른 잎도 잘라야겠지? 쟤네를 잘라줘야 다른 잎이 더 싱싱하게 자란다잖아.
아니야. 잘 크고 있는데, 괜히 다 잘라내면 보기에 휑하잖아. 게다가 얼마나 잘라내야 할지도 모르겠어. 지금이 가지치기할 적당한 시기인 걸까? 너무 많이 잘라냈다가 아펜란드라가 시들면 어떡해? 하는 고민으로 며칠을 화분 앞에서 서성였다.
문득, 영 거슬리는 인간관계가 떠올랐다. 딱히 누군가를 괴롭힌다거나, 뒷담화를 하지는 않지만 함께 있는 동안 묘하게 신경을 긁어대는 이웃이다. 만나자고 할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본인이 원하는 목적이 충족되면 한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대개 남의 집 자산 현황이라던가,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새로운 친구 하나를 만들기 위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몇 남지 않은 지인과 연결고리의 소중함도 새삼 느낀다. 그렇기에 시들어가는 관계 앞에서 망설이는 것이다.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이웃이잖아? 그냥 놔둬도 될 것 같고, 알아서 떨어져 나가진 않을까? 꼭 내가 이 관계를 끊어야 하나?
아펠란드라를 키워 온 것도,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 온 것도 내 노력이었다. 혹시나 한 번의 가위질로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결과가 오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아펠란드라의 시든 잎들을 싹둑싹둑 잘라냈다. 별 거 있어? 이미 시든 잎이잖아. 다시 예전으로 돌아올 수 없어. 끝이 노랗게 변한 잎들을 잘라내자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주변 다른 이들에게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잎을 잘라준 아펠란드라는 노란 꽃을 피워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운 후, 나는 한결 편하게 이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더 돈독해졌다. 각자의 집에 대출 상환액을 알아내려 애쓰는 존재가 하나 사라졌을 뿐이다.
인간관계에도 때로 가지 치기가 필요하다. 타 들어가기 시작한 잎은 무슨 수를 써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남은 가지와 잎사귀들의 영양을 빼앗아 갈 뿐이다. 희망이 없는 인간관계도 그렇다.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다 하여 내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관계에 신경 쓰느라 더 소중한 사람들에게 갈 에너지마저 소비해 버린다. 가끔, 가지치기를 하는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돌아보자. 나도 모르는 곳에서 말라가는 잎이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