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톱은 숨겨야 제 맛

<주간 나이 듦> 두 번째

by Soo

나는 몸치다.

유연성도 없다. 근력도 없다.

그래도 운동을 한다. 더 아프기가 싫기 때문에.


며칠 전 필라테스 수업을 갔을 때였다. (최근 필라테스에 빠져 있다) 처음 보는 회원이 옆자리에서 멋진 포즈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내가 하는 준비 운동과 비교하니 무림의 고수와 쩌리로 느껴졌다. 조금 주눅이 들었다. 게다가 운동을 조금 한 사람이라면 알만한 고가의 운동복을 멋지게 소화시킨 것도 부러웠다. 몇 달을 해도 나는 아직 멀었구나. 흑.


운동이 시작되었다.

어라? 아까 그 사람 어디 갔어?


그렇게 멋진 포즈로 스트레칭을 하던 사람은 몇 동작을 따라오지 못한 채 자꾸 자리에 주저앉는다. 겉모습만 봐서는 영락없는 코치였는데... 어느 동작 하나 제대로 ‘각’이 나오지 않는다. 열심히 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수업이 끝나고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예쁘게 틀어 올리며 헬스장을 빠져나갔다. 괜히 쫄았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생각처럼 쉽게 습관이 바뀌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겉에 보이는 모습에 부러워하고, 때로 기가 죽는다.


직장생활이 그랬다.

보이는 것에 쉽게 휘둘렸다.


나보다 뛰어날 것만 같은 사람 앞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 괜히 자기 PR을 한다든지, 뭐든 아는 체를 해댔다. '모릅니다'라는 말을 꺼내면 패배를 인정하는 거라 생각했다. 능력자로 보이고 싶었다. 능력자가 아닌 주제에 나댄 수습을 하기 위해 남들 몰래 야근을 밥 먹듯 했었다. 그렇다고 실력이 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하는데 왜 사람들이 몰라줄까 속상했다. 나는 스스로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도 파악 못하는 얼치기였다


내가 잘하는 분야를 깨달은 건 해외영업팀에서 여러 바이어들과 만나면서부터이다. 당시 팀장과 내가 콤비로 바이어들을 만났다. 팀장은 영어가, 나는 일본어가 특기였다.

일본 바이어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일본인 바이어들은 팀장과 주로 영어로 대화했고 나는 미소를 띤 채 자료 배포하거나 주로 대화를 경청했다. 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일본인 바이어들은 내가 들을 걸 예상치 못하고 속내를 떠들기 시작한다.


팀장이 자리로 돌아오고, 나는 일본어로 협상을 마무리한다. 내가 그럭저럭 유창한 일본어로 협상 내용을 쭉 읊으면 바이어들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간혹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고 듣기 민망한 이야기를 한 사람들도 있었다) 눈앞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던 조수 같은 저 여자가 자신들의 담당이고, 게다가 일본어를 하다니! 말실수를 했던가? 기억을 더듬는 모습도 보인다. 갑자기 바이어들 태도가 바뀌는 상황은 몇 번을 겪어도 재미있었다.


일본인들에게 초반에 일본어로 어필해봤자, 의미 없는 일. 내가 일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이 우리 제품을 구매 결정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단지 일본어를 하는 담당자가 있다는 점이 거래처로서는 플러스되는 지라, 협상이 성사될 만할 때 나서서 추가 장점으로 어필하고 계약을 맺는다.


발톱은 숨기고 있어도 무기이다. 늘 발톱을 세우고 있어 봐야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나만 피곤하다. 적당한 때에 스윽 보여주고 다시 감춰야 하는 것이 발톱이다.


20대의 나는 발톱도 없는 주제에 하루 종일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힘을 뺀다’는 의미조차 몰랐다.


30대의 나는 겨우 생긴 발톱을 내내 세우고 있었다. 내가 이만큼 강해! 날 좀 봐줘! 왜 날 인정해주지 않는 거야! 내게 상처 주지 마 절대로!라고. 때로 생채기를 내가며 싸우기도 했다. 싸워서 이겨야만 강한 줄 알았다.


그러다가 한번 넘어지고, 여기저기 다치고, 딱지가 앉고, 떨어져 나가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40대를 맞았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덕분에 초반부터 발톱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타이밍이 잘못 나간 발톱이 나 스스로를 다치게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40대의 나는 발톱을 잘 다듬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조금 둥글어진 덕분에 어지간해서 발톱을 꺼낼 일이 없다. 외모까지 동글동글해지니 호감도도 약간 올라갔다.


직장에서나 인간관계에서 일부러 잘하려 애쓰지 않게 되었다. 초반에 실수를 해서 마이너스 점수를 받으면 속으로 럭키! 를 외쳤다. 기대치를 낮춘다. 그리고 그 이상의 갭(gap)을 보여준다. 호감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길이다. 예전의 나였으면 혹시나 무시를 당할까 봐 잔뜩 발톱을 세운 채 두리번거렸을 것이다.


아, 발톱을 숨겨둘 줄 알면 생기는 덤,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레이더가 생긴다. 인성이 부족한 사람은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면 본모습을 쉽게 드러낸다. 약한 사람을 밟거나 이용하려는 자의 적나라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전엔 안보이던 것들이다.


한 때는 유일한 무기라 생각했던 나의 날카로움. 다루는 요령을 알게 될수록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근사해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 없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동동거릴 필요도 없다. 나는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면 된다. 조바심이 사라졌다.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나이가 들어 다행이다.



ps. 주머니에 넣어두었지만, 가끔은 꺼내서 휘두릅니다. 야옹!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말라가는 인간관계는 정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