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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여행가방

<주간 나이 듦> 세 번째, 속초 여행을 다녀왔어요

by Soo


친구들과 가을 속초여행을 다녀왔다.

체중은 3kg쯤 늘었을 것이다.

무서워서 체중계엔 못 올라갔다.

그냥 바지가 안 잠긴다.


여행 전날

단톡방에 짐가방 사진이 올라왔다.

1박 2일 여행에 캐리어가 등장해 웃음이 터졌다. 1박 2일의 일정이라면 속옷과 세면도구면 되는 거 아닌가? 얼마 전까지 내가 그랬다.


20대의 나는 출장도 많았고, 여행도 자주 다녔다. ‘밤도깨비’라는 상품이 히트를 치던 시기였다. 새벽같이 공항에 떨어져 갈 곳이 없어도 그저 신이 났다. 숙소에 묵는 날도 아침 8시면 호텔을 나서 밤 11시에 들어왔다. 혼자 간 여행에선 밥 먹고 커피 마시는 시간 외에는 계속 걸어 다녀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기 일쑤였지만 즐거웠다. (자기 전 발바닥 파스는 필수였다)


한 군데만 더 가자, 저기만 들렸다 가자, 편의점에도 들려야지. 많은 관광지가 날 유혹했다.


1박 2일, 2박 3일, 3박 4일, 밤도깨비용 짐 싸는 목록이 따로 있었고, 나중엔 매뉴얼 없이도 작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30대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서너 시간 수면과 하루 3만보에 끄떡없던 체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내 평생 가장 먼 여행지였던 하와이. 밤 비행기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데다 시차까지 겹쳐 일주일 남짓했던 일정의 반을 해롱대다가 날려버렸다. 시차가 안 맞으니 음식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여행 와서 소화가 안 된다는 느낌을 처음 느껴봤다.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호놀룰루 해변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없었다. 빡빡한 일정이 안 되는구나.


나는 늘 계획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엑셀로 만든 스케줄표에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대안 1, 2, 3이 늘 준비되어 있다. 빼곡한 일정을 클리어하고 숙소로 돌아와 사진을 하나씩 돌려볼 때의 성취감이란! 샤워 후 맥주 한잔 하며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잠이 드는 순간이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일정과 이별이다.


몇 년에 걸쳐 스케줄표의 공란은 점점 커졌다. 요즘도 일정을 짜긴 한다. 가장 빡빡한 날이 1일 2 관광지, 2 맛집, 2 카페가 있는 날이고 대부분은 1 관광지, 1 맛집, 1 카페다. 4~5군데도 너끈히 소화했던 관광지 일정이 빠르게 줄었다. 대신 식당이나 카페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관찰하거나, 도시의 공기를 음미해보고, 돌담의 감촉을 느끼는 시간이 늘었다.


많이 보고, 먹고, 사진 찍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내 눈에 담고, 내 피부로 느끼는 여행을 시작했다. 예전의 날 알던 사람들이 놀란다. 여행을 다녀오면 보란 듯이 블로그에 여행기를 올렸었다. 관광책자를 방불케 하는 스케줄이었으나, 지금은 어딘가에서 빈둥대며 찍은 사진이 전부다.


소중한 사람이 말했다.


“내가 나이를 먹고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어지면

어딘가에 앉아 내 인생을 돌아보겠지.

그때 새로 샀던 아이패드가 떠오를까?

패키지로 끌려 다닌 관광지가 떠오를까?

아니야.

난 너와 함께 본 오늘의 석양을 떠올릴 거야.”


많은 관광지를 가지 않아도, SNS에 인증샷을 올리지 않아도 초조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여행 패턴을 바꾼 계기는 건강이었다. 20대의 체력과 30대의 체력은 달랐다. 별거 아닌 듯한 오한에도 다음날 주저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40대의 체력은 또 다르다. 확실히 감기에 더 잘 걸리고, 위장도 탈이 난다. 오래 걸으면 발목에 무리가 온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프다. 그래서 속초 여행가방 안엔 비타민 C, 타이레놀, 감기약, 위장약이 추가되었다. 건강하게 놀고 싶다는 바람이 영양제를 챙기게 만든다. 지금은 작은 알약 몇 개지만, 몇십 년 후엔 나도 한 꾸러미의 약봉지를 꺼낼 날이 오겠지. 그래도 속초의 예쁜 카페에서 만난 할머님들처럼 호호백발에 친구들과 여행을 다닐 수 있으면 참 좋겠다.



ps 1. 다음번 여행부터 아이템을 하나 더 추가시키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요리용 ‘비닐장갑’!! 갑각류를 먹을 때 이거만큼 편한 녀석이 없었다.


ps 2. 홍게 칼국수 옆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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