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나이 듦> 네 번째 이야기, 머리를 싹둑 잘랐습니다
“저만 믿고 맡겨보시라니까요.”
유행하는 드라마 대사 같은 한마디에 웃음이 나왔다. 헤어숍 디자이너는 진지한 얼굴로 계속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꽤나 죽이 잘 맞던 디자이너가 사라진 후 1년이 넘게 헤어숍 유목민 생활 중이다. 어서 빨리 이 유랑을 청산하고 싶지만, 맘에 드는 디자이너를 만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냥 조금 다듬어주세요.’라 말하려던 찰나, “짧게 하시는 것이 훨씬 어려 보이세요.”라는 확신에 찬 한마디에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이 사람 내가 ‘예쁘다’는 말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이 잘 통하는 나이란 걸 알고 있다. 제법이다.
“그럼 한번 해볼까요?”
짧은 머리는 왠지 손이 많이 가는 이미지가 있어 꺼려왔었다. 그리고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마흔을 넘어 이제 중년을 맞이하는 나이가 되니 우리네 어머니들의 뽀글이 파마가 유독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왜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짧은 뽀글 머리를 하는 걸까? 예쁘지도 않은데…… ‘아줌마’의 시그니쳐와도 같은 뽀글 머리. 마흔 줄에 머리를 짧게 자른다는 건, 아줌마와 한걸음 가까워지는 듯하여 조금 거리를 두고 싶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내 헤어스타일은 늘 비슷했다. 어깨에서 등허리 정도로 길이만 변하는 롱헤어를 이십 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었다. 딱히 그 스타일을 좋아한다거나, 특히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묶을 수 있느냐’ 뿐. 일이 바쁠 때 머리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 여차하면 대왕 집게핀으로 틀어 올릴 수 있는 기능성이 포인트였다. 이마 주름을 가려볼까 궁리하며 앞머리를 내렸다 올렸다 하는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내 롱헤어와 뽀글 머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싶다. 어머님들도 최대한 손질하기 쉬운, 간편한 스타일을 내기 위해 저렇게 파마를 하시는 게 아닌지? 이제 직장도 그만두고 반백수인 내가 머리에 시간을 좀 들인다 한들 무슨 상관있으랴. 게다가 ‘어려’ 보인 다고 하니 도전해 볼만하지 않은가.
어이어이~ 잠깐! 을 외칠 새도 없이 머리는 한 뼘씩 잘려나갔다.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에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이대로 숏컷이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연예인이 아니라고! 이상하면 화를 내야겠지? 고민하는 사이 점점 가위 소리가 뜸해졌다. ‘위이잉~’하며 바리깡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중학교 때 이후 처음 느껴본 진동이 하마터면 반가울 뻔했다.
“드라이로 대충 말리셔도 되게 다듬어 놨어요”
디자이너는 의기양양하게 설명한다. 마음속의 투덜거림이 무색하게 거울에 비친 헤어스타일은 꽤 괜찮았다. 단발보다는 조금 짧고, 커트라 부르긴 조금 긴 정도의 딱 보기 좋게, 5살쯤 어려 보였다. 물론, 내일 아침엔 전혀 다른 스타일이 되어있겠지만 말이다. 성큼 짧아진 머리 길이가 뽀글 파마에 근접한 느낌도 들었다. 여기서 구루프 좀 말아주면 나는 그 시그니쳐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예쁜 나이의 대부분을 검정 고무줄, 갈색 집게핀과 함께했다. 여기서 십 년 즈음 지나면 뽀글뽀글한 머리가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손이 많이 가는 머리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동안 늘 꽁꽁 묶여있던 머리칼들에게도 해방을 줄 시간이다.
“다음에 또 올게요”
헤어숍 문을 열고 나오자 겨울 찬바람에 목덜미가 서늘하다. 그러나 부쩍 가벼워진 머리칼 탓인지 걸음걸이마저 사뿐사뿐 가볍게 느껴졌다.
Ps.
커트를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연예인은 김숙 씨. TV에서 간간히 보며 ‘저 단발도 참 매력 있네’라고 느꼈다. 더 이상 고준희가 롤모델이 아닌 걸 보니, 나이가 들긴 들었다. 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