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물비늘> 리뷰
흐르는 강물 사이로 물안경과 헤드폰을 쓰고, 금속 탐지기를 든 채로 뭔가를 찾는 중년 여성 예분. 그녀가 찾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영화 <물비늘>은 손녀를 사고로 잃은 한 여성이 숨겨진 비밀을 찾는 여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극을 이끌어간 예분 역의 김자영 배우는 물속에 침전된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러닝 타임 내내 묵묵히 상실과 죄책감 그 사이의 길을 걸어 나가는데요. 독립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옷소매 붉은 끝동> <천원짜리 변호사> 등 다수의 드라마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는 김자영 배우를 만나 물어봤습니다. 그 진실은 무엇인가요?
Q. <물비늘>의 시나리오를 받고 ‘강하다’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60대 염습사라는 직업이 주는 강함이 있었어요. 직업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으니까요. 주로 남자들이 하는 일이고, 매번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기에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 연장선으로 감독님에게 예분이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봤어요. 사별한 남편의 직업을 이어받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여기에 손녀를 사고로 잃은 후 우울하고 슬픔 감정을 계속 갖고 가야 하는 인물이라서 표현하기가 쉽지 않겠구나 생각했죠.
Q. 매일 금속 탐지기를 메고 물속을 찾아 헤매는 예분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극 중 경찰이 ‘아니 다 떠내려가고 뭐 없는데 왜 자꾸 거길 가서 그러나고’ 하잖아요. 실은 저도 같은 마음이었어요. 예분의 행동이 일반분들은 이해가 안 될 거예요. 근데, 죄책감이 있으니까. 술에 취해 손녀에게 욕을 하고 잘 돌봐주지 못한 그 죄책감에 뭐라도 하나 건지겠다는 마음 하나로 그런 행동을 하는 거니까 조금식 이해가 되었죠.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황에 맞는 연기를 했어요.
Q. 물속 연기가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비 맞는 장면에 같은 물은 아니지만 술 연기도 있고, 이래저래 물고생이 심한 작품이었습니다.
보는 것보다 강물 수심이 깊어요. 하반신이 잠길 정도였는데, 흐르는 물속에서 중심을 잡기가 어렵더라고요. 강바닥 자갈도 미끄럽고. 사전에 스탭이 안전한 포인트를 확인한 후 들어갔음에도 쉽지 않았어요. 특히 멀리서 찍을 때는 주변에 스탭없이 홀로 연기를 해야 하니까 살짝 두려웠어요.
손녀의 죽음을 알게 되는 비 오는 장면도 너무 힘들었어요. 11월에 촬영했는데, 강수기로 뿌린 물을 계속 맞고 추위를 이기며 감정에 몰입해서 연기를 해야 했죠. 끝에는 제가 어떤 감정을 갖고 연기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만취 연기도 인간 김자영을 버렸죠.(웃음) 술 먹고 손녀에게 욕을 하는 장면에서는 예분이 제정신이 아니니까 욕을 곱게 할 것 같지 않아서 그렇게 했어요.
Q. <물비늘>은 떠나간 사람이 아닌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과 죄책감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초반 예분은 감정을 표출하기보다는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을 표현하는데요. 그러다가도 손녀 이야기만 나오면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변하더라고요.
손녀에 대한 상실감과 부채감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가도 손녀 이야기나 손녀의 흔적을 찾는 걸 방해하면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뭐라고 하죠. 이런 부분이 손녀를 지켜주지 못해 그날 이후 딸과 소원해지고, 스스로 벌을 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Q. 이 먹먹한 감정선을 유지하기가 참 어려웠을 것 같아요.
<물비늘> 뿐만 아니라 여타 작품을 할 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순간의 진실을 잡는 거예요.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 찍지 않잖아요. 순서가 뒤엉키기 때문에 항상 감정을 머금으려고 해요. 매 순간 캐릭터의 감정에 사로잡혀 살 수는 없으니, 감정을 마음속에 머금고 있다가 연기를 하죠. 그럼에도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잘 안 돼요. 연기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게 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Q. 영화를 보면 삶의 아이러니함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분이란 캐릭터만 봐도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염습사이지만, 정작 사랑하는 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거든요. 손녀의 친구 지윤(홍예서)이도 사고 이후로 물에 대한 공포가 커졌지만, 수영을 놓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들에게 큰 상실감과 죄책감이 서려 있죠. 예분이는 손녀 사고 이후 염습사 일을 하지 않아요. 대신 그 무게감을 견디면서, 손녀를 잊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가려 노력하죠. 지윤과 함께 막역한 친구였던 옥임(정애화)의 장례를 치르면서 비로소 손녀를 떠나보내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게 인생이니까.
Q.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 친구, 지인 등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일이 많아졌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상실감이 연기하면서 도움을 줬을 것도 같아요.
개인적으로 중학교 때 돌아가신 이모가 생각나더라고요. 이모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충격이 컸어요. 더 인상깊었던 건 당시 염쟁이이라고 불렸던 장의사 분이었어요. 돌아가신 이모 입에 생쌀을 넣고, 손에 노잣돈을 쥐여 주는 모습, 타령 같은 걸 부르면서 망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극 중 염하는 장면 때 이 일이 생각났고, 남겨진 이모 식구들, 저에겐 사촌들인데, 그들이 가진 슬픔을 생각하며 연기에 임했어요.
Q. <미자> <기대주>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등 독립 단편영화를 통해 다채로운 중년 여성의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자>(2012)에서 이주노동자와의 사랑을 하며 미래를 꿈꾸다 끝내 포기하는 ‘미자’ 연기가 잊히지 않습니다.
선물 같은 영화였죠. 근데 처음엔 고사했어요. 처음에 받은 시나리오가 이주 노동자 대한 이야기였거든요. 노출도 좀 있었고. 그래서 감독에게 안 하겠다고 했죠. 근데 2~3일 후에 감독한테 전화가 왔어요. 만나자고. 그래서 미팅 자리에 갔는데, 미자가 주인공으로 바뀐 시나리오를 읽게 되었어요. 그래도 고민은 했는데, 하겠다고 했죠. 막 이렇게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라. (웃음)
촬영 때 상대 배우가 처음 연기를 하는 친구라 나름 고충은 있었지만, 잘 찍었어요. 이후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선보이고, 다음 해 감독이랑 ‘2013 베트남 국제단편영화제’에 가서 연기상도 받았어요. 겸사 겸사 하노이 관광도 좀 하고. (웃음)
Q. 진짜 선물 같은 영화였네요. <물비늘>도 첫 장편 주연작이라는 타이틀롤을 얻게 되었으니 이 또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랫동안 연기를 해오면서 얻은 기쁨이기도 하고요.
의미를 두는 평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연기를 해왔다는 건 저에게 행복이죠. 20대 때 극단 입단하고 4년 정도 하다가 결혼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연기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경력 단절이죠. 그러다 40대 중반에 다시 돌아왔어요. 연기가 너무 하고 싶더라고요. 돈은 안되지만, 도전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시작했죠.
연극을 하려고 하다가 잘 안됐어요. 나이 먹고 다시 돌아와 연기를 하려고 하니 쉽지 않았죠.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도 부담이 되었고요. 근데 남의 시선이 뭐가 중요한가 싶더라고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건데. 그래서 ‘필름 메이커스’에 프로필 올려서 단편 영화작업을 하게 되었죠. 특히 한예종 작품을 많이 했어요. 연기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설거지 등 알바도 하면서 늦은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작품에 참여하고 연기도 하는 게 감사해요. 그냥 너무 고마워요.
Q. 그 마음을 담아 연기한 <물비늘>은 삶과 죽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본 시니어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추천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요.
하나를 꼽기 힘들지만, 예분이 옥임의 염을 진행할 때 장면은 꼭 보길 바라요. 아무래도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시니어분들이 그 장면을 보고 감정 이입을 많이 할 것 같아서요. 젊었을 때는 무한한 삶을 영위할 것처럼 살지만, 나이가 들면 알잖아요. 끝이 있다는걸요. 예분도 그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운 일을 하지만 손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제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해요. 시니어 관객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삶이란 무엇인지를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Q. 많은 분이 이 영화를 보고 삶의 소중함을 느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다소 무거울 수 있지만, 마지막 예분과 지윤의 연대를 보면서 작은 희망을 발견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힘도 얻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저에게 연기가 그러하듯 모두 행복하길 바랍니다.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를 통해 조만간 인사드릴 것 같아요. 영화 <물비늘>도 보시고, 드라마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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