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을 위한 예술

-영화 <패터슨> 으로부터

by 시그리드

2017년 말 개봉하여 2018년에도 여전히 관객을 만나고 있는 영화 <패터슨, Paterson>은

저물어가는 해의 끝자락에서뿐 아니라, 새롭게 태어날 것임을 다짐하는 새해에도 잘 어울릴 영화다.

현재 일상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약 일주일 간의 패터슨의 일상을 쫒는 단순한 플롯인 이 영화는, 그 단순한 일상에 숨겨져 있어 일반적인 대중영화라면 다루지 않았을 이야기를 '줌인'하여 들여다 본다.


놀라운 건 각 일상에도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이고, 극적이진 않더라도 개인의 삶으로 본다면 충분히 스펙터클하다. 그리고 그 삶은 예술의 좋은 재료가 된다.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예술

<패터슨>을 본 많은 사람들은 영화가 2시간 이라는 긴 시간동안 사려깊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메시지에 매료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예술이란 것은 우리 공기 같은 것이어서, 세상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그 속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민감한 누군가는 '예술'을 명민하고 독창적으로 표현해내며 이름을 날릴테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창한 것 없이 사소한 것에서 작은 영감을 얻고는 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든 미술이든 나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창작될 수 있다. 그 예술에는 귀천이 없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된다.

패터슨은 매일 마빈과 함께 산책을 하고, 바에 들러 맥주 한잔을 기울인다.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할 수 있겠지만, 조금만 지나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것이란 걸.


같은 것을 다르게 보기 - 쌍둥이의 이미지가 말하는 것

영화에는 내내 쌍둥이 등장인물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버스 승객들, 바의 손님들, 버스 차고지에서 만난 소녀들까지 패터슨은 다양한 쌍둥이를 만난다.


이 부분 역시 예술의 의미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들어간 부분처럼 보이는데, 같은 외양을 지니고 있더라도 실제 그 내면은 다른 것이고 절대 똑같이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는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같아 구분하기 어렵지만, 그들의 미래는 각자의 취향, 능력, 사고 등 에 의해 달라지기 마련이다. 예술이라는 것도 예술의 재료들(사람이든, 무생물이든, 개념적인 것이든)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남들에게는 그냥 평범한 전봇대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기분을 대변할 소재가 될 수 있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시작이다.

아담 드라이버는 <걸스> 라는 미드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호감이 가지않는 배우였다. 특유의 오만함과 대책없는 캐릭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다.


예술의 힘은 공감으로부터

영화에선 두가지 상실의 경험이 존재한다. 월~금요일까지 평일을 지나 토요일에 이르면, 패터슨은 그의 시가 적힌 하나밖에 없는 노트를 잃어버린다. 사실, 잃어버렸다기 보다 반려견인 마빈이 찢어버린 것이지만.


그는 무덤덤하게 반응하지만, 그가 내적으로 겪는 혼돈과 허무함은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된다. 허전함을 잊고자 혼자 나간 산책에서, 패터슨은 우연히 에버렛이라는 청년과 마주한다. 에버렛은 여자친구에게 실연을 당한 청년으로, 바에서 가짜총기로 난동극을 벌이다 패터슨에게 진압된 전적이 있다.


에버렛은 패터슨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데, 패터슨의 표정은 지난 평일에서와 조금 달라보인다. 무덤덤하지만, 에버렛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사랑의 대상(시 노트나 연인)을 잃어버린 둘은 상실감을 공유하는 것일텐데, 외모는 다를지라도 감정은 동일한 '쌍둥이' 가 된 것이다.

그렇게 예술은 '다름'을 찾기도 하지만, '같음'을 담아 공유함으로써 더 큰 힘을 갖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