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날 : 덕후의 기쁨과 슬픔

저, 걸그룹 좋아합니다 - 번외

by 시그리드

덕후의 기쁨과 슬픔


올봄은 덕후로서 나에게 굉장히 기쁘기도 슬프기도 했던 시기였다.

드디어 최애가 데뷔를 하였고,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그동안의 끊임없는 노력을 증명해냈다.

무대에서 찬란하게 빛이 났으며, 맑고 청량한 것이 트레이드마크였던 목소리는 더욱 깊어지고 다채로워졌다.

그저 꿈 많은 아가 아이돌이었던 아이에게서, 아티스트의 얼굴을 보았다.


3년이 넘게 보았던 모습보다도 인터뷰로, 콘텐츠로 더 많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다행스럽게 안도했다. 2018년 처음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여전하구나 하는, 여린 얼굴이지만 단단하고 굳건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 반. 대중 앞에 서지 못했던 1년여의 기간 동안 수많은 고민의 밤과 수련의 시간을 보냈구나 하는 그런 마음 반이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하나하나 멤버가 공개되며, 호기심을 자극하고 사랑만 받아도 모자란 와중에 일련의 사건이 터졌고 그룹은 안 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었다. 덕후 마음 뻐렁치게하는 멋진 그룹 이름의 기원과는 달리, 흡사 10여 년 전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공개되고. 팀의 존폐를 위협하는 한 멤버의 이슈가 모든 것을 갉아먹었다.


데뷔 전부터 계속되는 잡음으로 심경이 복잡해졌다. 특히, 가장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시기에, 나의 최애의 영상과 이미지가 공개될 예정이었다. 여느 때처럼 완벽하게 해내는 최애를 보며 행복했지만, 혼란스러웠다. 알지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났다. 지난 몇 년간 다사다난하고 그만큼 행복했던 덕질의 역사를 지나, 이제는 좋은 일만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몇 년 동안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했다. 특히, 남초 팬덤이 강한 여성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면서 더 절실하게 느꼈다. 아이들이 선한 마음만 받길, 그들에게 가해지는 편견과 성적 대상화 방식에는 분노하고, 좋아하고 잘하는 음악과 무대를 하며 오로지 행복하길 바라왔다. 이와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내야 한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체득하기도 했다. 시대와 팬덤이 변화하면서, 그 요구에 맞춰 산업도 달라졌다. 개성이 뚜렷하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아이돌들이 데뷔했고 사랑을 받았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믿었다.


그러나 대혼돈의 소용돌이 속이었다. 도덕적으로, 지금 의혹의 여지가 확실한 상황에서 나는 이 그룹을 그대로 좋아해야 하는가라는 갈등 했다. 하지만,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내 최애는 변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그대로고, 언제나처럼 진심을 다해,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는 것은 덕후의 자세다. 아껴주고, 예전보다 더 많은 응원을 해주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결국 소속사는 결국 6명의 체제로 강행을 했고, 그 안이하고 시대착오적인 결정은 결국 문제가 터졌다. 활동한지 2주 남짓 되었을까. 부정할 수 없는 증거와 법적 공방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이 구렁텅이에서 빼내야 했다. 팬덤은 항의하기 시작했고,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그제서야 소속사는 '잠정 5인 체제'라는 비겁한 결정만 내던지고는 내뺐다.


그 후로는 오히려 승승장구였다. 음원 차트는 역주행했고, 영상 조회 수는 상승세였으며, 이제서야 편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둥 여론도 호감으로 돌아섰다.


이건 이 아이를 비롯한 멤버 개개인의 매력 덕분이란 생각이 든다. 일련의 사태에 대한 대응을 생각하면, 그 뒤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꽤 프로모션을 잘 진행시켰다고 하더라도 소속사를 칭찬할 생각은 없다. 이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아이들 때문이다. 그 진심이, 그 노력이 닿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멤버 구성으로 하하 호호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잠정'이라는 단어에 머물러있었다. 내심 불안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의 날

7월 20일.

드디어 공식 발표가 올라왔다. 탈퇴와 공식 5인 체제 선언.

그간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는 '해방의 날' 이었다.


무척이나 즐겁고 후련했고, 팬덤에게는 축제나 다름없었지만 한편으론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다.

얼마 전 읽었던 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드디어 얻어낸 무결한 5인 체제는, 소비자(팬)가 결국 생산자(소속사)의 의지를 변화시켜, 원하는 결과물을 도출한 '승리'일까? 나는 이것이 반쪽짜리라고 생각한다.

K-POP 팬덤을 학문적으로 파헤진 책 <페미돌로지>에 의하면, 전속계약 해지는 소비자로서의 팬덤의 노력의 산물이라는, 아이돌이라는 대상을 소비하는 주체로서 요구한 당연한 권리 획득이다. 기획사는 우리의 '피드백'에 응답했고, 이런 성공의 경험은 팬덤의 소비자 정체성을 강화한 것이고.


그만큼 팬덤에게 도덕성은 중요한 기준이다.

K-POP 아이돌은 도덕성과 성실성 그리고 아티스트로서의 성장 외에는 다른 욕망을 품지 못하는 무결성을 강요받는다. 이건 아이돌이 1020대 팬덤에 기초해 '롤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경 같은 믿음을 근거하기에는 비인간적인 면이 있다. 특히 이것은 여성 아이돌에게 더 가혹하게 적용된다.


소속사는 아무리 해도 정리가 되지 않는 어떤 상황에 직면했거나(이걸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무능력한가) 혹은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려서 지금과 같은 체제로도 충분히 성공이 입증되었으므로 '팬덤에 부응하는' 모양새로 정리했을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치졸하고 아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사실상 상품 가치가 있다-을 증명하기 위해, 10-20대 아이들을 방어막으로 불필요한 감정 소모와 (언어)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를 냈어야만 했나.



진짜 피어리스를 보여주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 있다면, 목소리를 계속 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소비자로서, 여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 팬으로서, 같은 '여성 청년'인 아티스트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분명 다른 형태로 비슷한 일들은 반복될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 다수가 흡사 정의의 사도가 된 것처럼 싸잡아 공격하거나, 특정 집단에 의해 대상화되어 소비되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판을 깔아준 영리하지 못한 소속사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다. 계속해서 지켜보고 싸울 것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최애가 언제나 아름다운 것만 보고 응원의 말만 듣고 충만한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힘이 될지 모르나, 이 응원이 언제나 닿기를 바란다.



<페미돌로지>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해본다.


여성 청년 역시 갑작스레 등장하지 않았다. '국민 여동생'이었던, 혹은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이라고 외치던 소녀들도 영원히 어리지 않았다. 어느새 성인 여성이 되어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는 동시에 강남역 사건, 낙태죄 폐지, #스쿨 미투, N 번 방 사건 등 여성 이슈의 공론화와 여성운동의 세력화에 목소리를 냈다. 다시 말해 걸그룹 멤버 역시 삶의 한 시기만을 무대에 올리는 존재가 아니라, 전 생애라는 무대를 같이 만들어나가는 이 시대의 여성 청년이다.


요컨대 걸그룹은 탈 성애적이어야 하면서 성애적이어야 한다는 여성 청년을 향한 모순, 그리고 혐오와 멸시뿐 아니라 숭배와 찬양까지도 포괄하는 여성 혐오가 가장 먼저 적용되는 존재이다. 이 잔혹한 과정에서 스러져간 별들이 어렵지 않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떠오른다. 이러한 동시대적 감각에서 여성 팬들은 특정인에 대한 신속한 배제를 결정하기보다 긴장을 견디며 경합을 겪어내는 실천을 해나가기를, 그리하여 저 멀리 반짝이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여성, 아이돌이 수많은 여성 청년과 더불어 이 시대를 무사히 건너가기를 바란다.


<페미돌로지> '초국적 한류와 걸그룹 노동' / 류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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