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의 사랑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작품은 매우 색다른 충격이었다. 유행처럼 번지는 '멀티버스' 소재의 이야기들은 이제 식상하다고 느껴질 법한 시기에 상상력의 마지노선에 다다르기 위한 어떠한 시도를 보았다고 느꼈다. 이전 시대의 '평행 우주'에서 더 나아가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다중 우주'의 세계는 내 상상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생각하기를 그쳤던 시절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통찰력 있는 사유를 제시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굴레,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허무함. 모든 것이 의미 없음을 느끼게 되는 영겁의 시간들 속에서 이 영화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주제로 이야기를 수렴한다. 결국엔 '가족'과 '사랑'이다. 너무나 클래식해 이제는 진부하다고 느껴질 만한 주제를 가장 참신한 과학적, 창의적 소재와 버무려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나'라는 정체성을 가진 다채로운 우주 속에서 시기 별로 맞닥뜨리는 사건들과 선택들로 계속해서 갈래를 나눠가는 무한한 뿌리들 속에 겨우 한 가닥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인 하필이면 가장 '하찮은', '보잘것없는' 버전의 '나'인 채로 살아간다. 현실의 비참하고 남루한 환경이 아닌 대단하고 반짝거리는 삶의 '나'를 보면서 현실을 더욱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질 거라 생각했다. 물론 주인공도 그랬지만 감독은 하필 그 가장 '보잘것없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녀가 넘나드는 다른 우주의 그녀들은 그렇다고 대단히 성공한 버전만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의 세계가 나은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결국 투박하게 정리하자면 모든 우주의 그녀는 자신의 세계가 가장 불행하다고 느낄만한 부분들이 모두에게 분명 있다. 하지만 반대로 모두의 우주가 가장 낫다고 할 만한 부분들도 있다. 내가 그들의 삶을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삶을 돌아볼 뿐이다. 만약 그 다중 우주 이론이 정말 사실이라면, 영화에서 시각화 해준 세상들이 전부 있는 거라면 나는 몇 번째로 괜찮은 삶인가. 하지만 이내 '몇 번째'란 의미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현재의 삶이 나의 수많은 버전들 중에 가장 나은 버전은 아닐지라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고,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을 아내로 맞았고, 나는 정말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데리고 있다. 좀 더 풍요로운 '나'도, 좀 더 외로워할 '나'도 모두 '나'라면 누구에게든 질투하고 시기할 필요는 없겠다. 그저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나'들을 기특해하며 안쓰러워하는 게 맞겠지.
고로 나는 내 삶과 현재를 사랑하는 것을 다시 알게 됐다. 더 감사하고 매 순간을 기쁘게 살아야겠다. 어차피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더라도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음'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순환하는 삶이 결국엔 '무'일 뿐인 거라면 그 과정도 필요 없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오늘 한 번 더,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