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따뜻했던 제주살이를 마치며
우리 가족에게 제주로의 부르심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한 가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시간을 통해 새삼 알게 된 건, 하나님이 지으신 이 큰 자연 앞에서 나의 소소한 걱정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매일 반복되는 특별할 거 없는 하루하루 나의 일상이 그 자체로도 귀하고 빛나는 하루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주어진 매일매일에 충실하고 서로 아낌없이 사랑하며 마음의 욕심을 덜어 여유로운 일상의 넉넉함을 풍요롭게 누린 시간이다. 때론 조급함이 밀려올 때가 있었지만 이 또한 준비되는 과정이라 여기며 애써 미래의 다가올 시간들을 예상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이뤄나가는 우리 가족의 작은 역사가 그저 기쁘게 드려지길 바라면서.
자연에 어울려 산다는 건 단순히 숲과 바다를 찾고 집 앞 마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수풍뎅이나 개미들처럼 작은 존재를 살피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감각을 깨닫는 일이 아닌가 싶다. 내가 바라보는 하늘의 구름이 어떻게 움직이고, 언제 새싹이 돋아나고, 냄새로 봄을 먼저 느끼고 바람이 차가워지는지를 느끼며 계절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시간이다.
아이는 물이 빠지고 드러난 돌멩이 사이에서 보말을 줍기도 하고 둥둥 떠다니는 미역을 모아 한아름 들고 와서 미역국을 끓여 먹자고 한다.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보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고 흙냄새 한가득 한 산책길을 나란히 손잡고 걸으며 다람쥐를 찾는다.
봄이면 마당의 잔디에서 돋아나는 새싹을 관찰하고 냄새로 봄을 먼저 알아채고 집 앞 귤밭에서 넘어오는 귤꽃 향이 온 집 안을 감싼다. 여름이면 마당에 마음껏 물을 뿌리며 뜨거운 해와 마주하고 가까운 바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을이면 마당에 텐트를 치고 밤하늘을 보거나 이웃들과 바비큐를 한다. 겨울에는 눈이 소복이 내린 동네에서 눈썰매에 아이를 태우고 놀았다. 이렇게 제주의 중산간 마을에서 사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엄마~ 구름이 프테라노돈 모양이야”
“장수풍뎅이가 엄마를 찾나봐~ 같이 찾아주자~”
“엄마 귤꽃향이 나~ 귤이 잘 자라고 있나봐~ 하면서.
자연과 아이가 이어지고 아이와 우리가 이어졌던 제주.
사계절 아름다웠던 자연곁에서의 삶.
찬란했던 그 시절 우리.
단 한순간도 같지가 않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 매일 찾아오는 하루는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살아내는 오늘도 내가 처음 맞이하는 것이다. 매일 바쁘고 가열차게 하루를 보내다가 제주에 처음 내려갔을 땐 너무 시간이 많아 무엇을 해야 할지, 좋은 자연의 모습도 매일 보니 지루하다고 느껴진 적이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가 무력하고 나태하게 느껴질 즈음, 아침마다 일어나서 보는 하늘이, 아이와 보내는 매일매일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노을 등 내 삶에 존재하는 매일을 단 한순간도 같지 않은 새로움이고 특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가에 핀 꽃에서, 어여쁜 하늘에서, 신선한 바람, 아이와 마주 보는 시간, 친구와 나누는 대화에서 매일 날 살아가게 하는 그 의미를 떠올려본다. 제주에서 받은 선물이다.
창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런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라 매일매일 열심히 두 눈에 마음에 담아둔다. 잔잔히 흐르는 구름과 따뜻한 색으로 덮인 귤꽃 나무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 벅차오르는 마음. 다시 오지 못할 지금 이 순간. 제주에서의 다정한 낮 시간. 일상의 풍요다.
제주도에 살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꼽는다면 어디를 가든 바다가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와 바다에 가면 모래놀이는 기본이고 물놀이, 파도와 함께 놀기, 밤에는 산책하며 폭죽 구경하기까지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하얀 모래 위로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를 발로 느끼고 찰랑찰랑 물장난을 치는 아들을 보고 있자면 이 시간 제주에서 보내는 일상이 더욱 감사할 뿐이다.
아이가 한참 해변을 따라 까르르 웃으며 뛰어가는 사이, 나는 아이의 뒤를 쫓아 천천히 해변을 걸으며 바다의 풍광을 즐긴다. 아이와 따사로운 낮 시간을 신나게 보내는 제주의 바다지만 해가지는 광경을 마주하게 될 때면 이게 천국이구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가 소리쳐 불렀다
“ 엄마~ 하늘이 정말 예쁘다~ 엄마가 좋아하는 색이야~ 빨리 찍어~~”
하늘이 온통 붉으니 얼른 카메라를 가져오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내 아들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아이는 매일 하늘과 바다를 보며 제주에서 그렇게 자란다.
제주에서의 시간 동안 나는 여유를 얻었고 세상을 대하는 유연함을 배웠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과 매일 해야 할 일은 없어졌지만 대신 하늘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었고 빽빽하게 채워져 있던 매일의 계획과 내가 정해놓은 인생의 계획에 맞춰 살아야 안정감을 느끼던 내가 특별한 계획이 없는 매일의 일상과 1~2년 후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계획이 없이 살아보는 건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굳이 무엇을 하지 않아도 주어진 환경과 삶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것. 나와 우리 가정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그분은 늘 신실하시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숲에서 흥얼거리며 춤추듯 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제주에서 함께 보낸 지난날들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살랑살랑,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빛깔의 초록 숲, 그리고 그 안에서 보낸 우리의 소중한 시간들이 더해져 제주에서의 아이의 일상이 매일 이렇게 차곡차곡 예쁘게 쌓여있다.
아이와 꼭 붙어 보낸 2년의 제주살이 동안 아이의 시간에 내 시간을 온전히 보태느라 내 인생은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움도 일었지만, 아이의 시간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아이와 매일 돈독해지는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겹겹이 쌓인 우리의 시간을 아이가 마음으로 몸으로 오래오래 기억해 줬으면.
제주에서 육지로 복귀 후 지금은 다시 일하는 엄마 워킹맘이 되었다. 2년 전 처음 제주에 내려갔을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일하는 엄마라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침에 아이는 학교에, 나는 회사로 가면서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만나자고 말한다.
저녁에 아이를 맞이할 땐 더없이 반가워하고 보고싶었다고 말하며 하루종일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부모가 자기 삶을 귀하게 여기며 정성을 다할 때 아이의 모습도 부모가 원하는 그 모습으로 변한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다. 내가 만들어가는 기회와 효능감을 느끼는 모든 일들이 내 아이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거라고 생각한다.
그곳 제주에서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나와 아이, 우리 가족은 여기에서의 삶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서로를 다독이며 사랑하며 그 자체로 빛나는 일상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