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만에 엄마랑 단둘이 1박 2일.

by 팜므홍

크리스마스이브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아빠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꽉 막힌 도로를 보고 있자니 광화문으로 출퇴근하는 아빠 생각이 갑자기 났다.

아빠에게는 살가운 딸은 아니고 통화도 자주 하지 않지만 그래도 제법 친하다.

전화를 하자마자 아빠가 엄마랑 크게 싸웠다며 나보고 좀 달래주랜다.

백 프로 아빠 잘못이다. 엄마는 아빠에게 잘못하는 일이 없으니깐, 이건 무조건적으로다가 아빠가 큰 이유 없이 엄마한테 성질을 낸 것일 테다.

아니 다다를까 엄마한테 전화를 했더니 내색하지는 않지만, 아빠에 대한 서운함과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있는 서글픔이 느껴졌달까? 나라도 가보면 좋으련만.. 늘 마음뿐이지

대뜸, 엄마가 바다가 보고 싶다며 가슴이 답답하다며 어디 훌쩍 떠나고 싶다 했다.

그래, 그러자! 나 안 그래도 1월 2일 하루 휴가인데.

그때 우리 둘이 1박 2일로 어디라도 가자! 해서 급하게 고창여행이 결정되었다.


42년 만에 처음이었다.

엄마랑 단둘이 1박 2일 여행이라니..


설레면서도 걱정이 앞선 건 사실이다.

나는 전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냥 뭐 우리 집에서는 파이터(fihgter)로 통했으니깐.


Chat GPT에게 여러 번 질문을 했었다.

엄마랑 단둘이 여행 가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

무슨 주제로 대화를 하면 좋을지 등

을 질문했더니,

엄마, 힘들어? 하면서 계속 묻지 않기!

내가 낼께 하며 계산하는 것을 생색내지 않기!

엄마가 속상해할 만한 친가식구들의 이야기 꺼내기 않기 등

(Chat GPT가 나보다 낫구나, 했다. 작년에 동생이랑 다 같이 간 여행에서 내가 "엄마 힘들어?"를 백번이나 물어봐서 결국엔 엄마가 짜증을 냈었다.)


대전에서 고창까지는 운전해서 2시간 거리인데,

그 시간이 후딱 지나갈 만큼 금방 이었다. 엄마가 어린아이가 된 것 마냥 조잘조잘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신 것도 있지만, 평소 통화라면 적당히 엄마 이야기를 듣다가 끊어야겠다는 신호를 보내던 때랑은 다르게 좀 더 엄마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 것도 있다. 아예 마음을 굳게 먹고, 엄마를 위한 이틀을 만들겠노라고 단단히 각오하고 왔으니깐!


엄마가 요즘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지, 교회에서 탁구를 배워볼까 한다는 거랑 최근 동네 아줌마끼리 보러 간 하정우의 영화가 정말 별로였단 이야기, 엄마가 젊었을 때 수박과 조기를 사가지고 초콜릿이모를 만나러 간 이야기, 두 딸들이 암웨이사업을 그만두고 나서는 엄마 마음이 얼마나 편안한지 또 그것 때문에 오래 알고 지낸 친구한테 서운함을 느꼈다는 등의 엄마의 일상을 담을 수 있었다.


엄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올 때도 식당 사장님께 잘 먹었다고 다정하게 인사를 하는 사람이고,

숙소에 도착하자마 짐을 착착 정리해 놓으실 만큼 깔끔하고,

작은 것에도 크게 감사의 표현을 해주는 사람이다. 사진 찍는 것도 굉장히 좋아하고, 예쁜 것을 알고, 여전히 소녀 같은 엄마였다.


우리가 묶었던 숙소에는 노천탕이 있었는데,

내가 몇 번 와보고 너무 좋아서 언젠가 엄마 한번 모시고 와야지 했던 곳이었는데 역시나 좋아하실 줄 알았다.

- 일본을 왜 가니? 국내에 이렇게 좋은 데가 많은데

란 말을 진짜 이틀 동안 50번은 하신 것 같다. (최근에 내가 일본 여행을 좀 다녔더니 ㅎㅎ)


이튿날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아침 일찍 1등으로 조식당에 들어가서 창가 바로 옆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서 엄마랑 아침식사를 했는데

그 순간이 나는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엄마는 계속해서

참 좋다. 여기 너무 좋다.

라고 이야기 하시고 (일본을 왜 가니? 도 여기서 10번은 하신 것 같다ㅎㅎ) 정말 창밖의 풍경은 너무 좋았다.




KakaoTalk_20260110_153347658.jpg



선운사에 들러서

엄마가 십몇 년 전, 아빠와 선운사에 와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하고

감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감들을 보면서 어느 날의 추억들도 이야기해 주었다.

아쉽게도 내가 주책맞게 여름 운동화를 신고 가는 바람에 양말이 다 젖어서 선운사까지만 갔다가 내려온 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쉽다.


1년에 한 번씩 이렇게 국내여행을 계획해 봐야겠다.

1년에 한 번이라 해도 10년이면 10번일 거고, 20년이라 봤자 스무 번이다.


엄마랑 둘이 가서 대차게 싸우고만 오는 거 아냐? 하던 주변의 걱정들이 무색하게 나에게도 너무 힐링이 된 여행이었고, 엄마와 내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여행이다. (좋은 의미로다가)





작가의 이전글예비중등맘 이란 이런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