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동거 시작
나와 남자친구는 초반에 장거리 연애를 했다. 함께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졸업한 뒤, 나는 판교로 회사를 다니고 남자친구는 대전에 남아 대학원을 다녔다. 판교-대전, 시외버스로 2시간 거리였다. 보통 남자친구가 대전에서 올라왔고, 처음에는 당일치기로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시간이 좀 지나서는 내 자취방에서 하루 자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금요일에 한 주 일정을 마무리한 뒤 올라와서는 일요일까지 함께 지내다가 돌아갔다.
남자친구가 대전에서 살 때야 기숙사에서 자는지 여자친구 집에 있는지 부모님께서 모르실 테니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대학원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부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제 주말부부 생활은 못하게 되나' 했는데, 웬걸, 남자친구는 평소처럼 금요일 퇴근 후 내 자취방으로 왔다.
"부모님께 우리 집 온다고 얘기드렸어?"
"어디 간다고는 이야기 안 했는데, 딱히 상관 안 하시더라고."
남자친구는 부모님의 관심은 지금 손주한테로 다 옮겨가서 '아들은 알아서 잘 지내겠거니' 하신다고 웃었다. 그렇게 남자친구는 일요일까지 내 자취방에서 함께 지내다가 돌아갔다.
둘이 주말을 함께 보내는 시간이 계속되다 보니, 이럴 거면 둘이 합쳐서 좀 더 큰 집에서 사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집도 문제지만, 다른 것 보다 같이 2-3일을 보내다가 일요일 저녁에 남자친구가 돌아가고 혼자 집에 남았을 때의 그 적막이 너무 싫었다.
"나 올해 말에 지금 집 월세가 끝나는데, 다음 2년 정도만 더 살고 결혼해서 신혼집 구하면 어때?"
밤에 전화하던 중에 '결혼' 이야기를 툭 꺼냈다. 당연하게 괜찮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남자친구가 의외로(?) 회의적이었다. 당시 남자친구는 병역 특례 중으로 '군인 신분'이었는데, 아직 사회적으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나이도 겨우 만 25살 됐었으니 어리기도 했다.
"결혼 안 하고 그냥 같이 살면 되지 않아?"
잘 모르겠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그냥 같이 살자'는 말이 바로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하자'라는 프러포즈를 했다가 거절당한 건데 별로 마음이 상하지 않았던 걸 보면 나는 애초에 '결혼'이 목적이 아니었던 거다. 그냥 같이 살고 싶었는데 동거가 일반적이지 않다 보니 '결혼'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왔을 뿐. 그래 뭐, 결혼이 부담스럽다면 결혼은 빼고 그냥 같이 살면 되지.
"부모님이 허락 안 해주실 거 같은데..."
"에이, 한 번 말이라도 꺼내봐."
답변은 곧 받았다. 남자친구가 부모님께 동거 이야기를 꺼냈는데, 걱정과 달리 "어차피 너희 주말마다 같이 지내지 않냐"라고 하시면서 아주 흔쾌하게 허락하셨다고 했다. (아들이 주말마다 사라지는데 부모님이 모르실 리가 없었다) 대신 둘이 합치는 건 괜찮은데, 그래도 한 번 얼굴 보고 밥이라도 먹자고 하셨다. 그렇게 날을 잡고, 남자친구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두 번째 뵙는 자리였다.
남자친구 부모님은 내 자취방에서 둘이 생활이 가능한지, 거기서 출퇴근은 가능한지 물어보셨고, 우리 부모님도 딸의 동거를 허락하셨는지 확인하셨다. 나는 이미 부모님께 동거도 괜찮다고 확인을 받은 상태여서 그 부분은 문제가 없었고, 자취방은 좀 좁긴 하지만 이미 주말부부로 생활하고 있었으니 괜찮았고, 출퇴근거리는 오히려 내 자취방이 회사까지 더 가까웠다.
"그래? 그럼 그냥 오늘 같이 돌아가면 되겠네~"
부모님은 허락을 넘어, 그냥 오늘부터 같이 살라고 하셨다. 남자친구는 부모님께 작은 쇼핑백을 하나 받아서는 당장 입을 옷만 겨우 챙겨 넣었고, 부모님은 정말 기쁘게 웃으시며 잘 살라며 아들을 내보내셨다. 남자친구는 그렇게 집에서 쫓겨났다. (부모님이 정말 쫓아내신 건 아니지만, 남자친구는 지금도 '그건 쫓겨난 거다'라고 말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베이지색 무인양품 봉투와 함께 얼떨결 한 기분으로 판교로 돌아가는 3000번 버스를 기다리던 그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둘 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서로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집에 도착해서 챙겨 온 짐(이라고 하지만 진짜 얼마 안 되는)을 대강 정리하고, 각자 씻고 자리에 누웠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같이 살기 시작한다고?
그렇게 동거를 시작했다. 말을 꺼냈을 뿐인데 부모님의 흔쾌한 허락 덕분에(?) 추가로 재고 따지는 거 없이 갑자기 같이 살게 됐다. 물론 허락하신 부모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5년 넘게 결혼도 안 하고 살다가 아기 먼저 낳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셨을 거다. 아마 미리 아셨다면, 억지로라도 결혼을 시키지 않으셨을까! 나중에 기회 되면 여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