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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김무명 Jan 22. 2021

#2. 노예의 하루는 너무 길다

가난의 발단

가난의 발단


50년대생이신 부모님은 두 분 다 서울에서 명문대를 나오셨다. 부모님 세대에는 대졸자의 비율이 낮았고, 그 당시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아버지께서는 월급이 꽤나 많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니셨고, 영업 쪽 일을 하셨기에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40대 중반에 퇴사를 하시고 강원도에 정착하셨다. 


서울에 아파트를 정리하고 퇴직금을 모아 3층짜리 상가 건물을 건축했고 1층에서 음식점을 시작하셨다. 


© mikbutcher, 출처 Unsplash


구입했던 건물의 가치는 현재 주변 시세로 봤을 때 약 13억 정도인 듯하다. 대학교에 매우 인접해 있어 입지가 매우 좋았다. 


1층에는 식당이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부모님이 운영하셨고, 2층에는 원룸이 여섯 개가 있었다. 


3층은 주인 세대로 우리 가족이 살았다. 제대로 굴러가기만 하면 한 달에 임대료만 그 당시 200만 원 이상 나오는 건물이었다.


그렇게 풍족했던 환경은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송두리째 사라졌다. 


아버지가 친척의 빚보증을 서준 것이다. 지금 글을 적으면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숨이 막히는 듯하다.


© PublicDomainPictures, 출처 Pixabay


이후, 그 한 번의 선택으로 부모님은 18년 동안 빚을 갚으면서 살았다. 은행에만 넣어놔도 4~5%의 이자가 붙던 그 시절에 대출금 또한 줄지 않고 복리로 계속 늘어났다. 


1 금융권에서 시작된 대출은 2 금융권을 넘어 동네 일수까지 넘어갔다.



노예의 하루는 너무 길다


처음에는 월세방을 하나씩 전세로 돌리면서 급한 불을 끄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수억 원의 빚을 갚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 가족은 처음에는 3층 주인 세대에서 살다가 몇 년 후에 2층 원룸에서 살았다. 그렇게 버티다 또 몇 년 후에는 가게에서 생활했다. 


낮과 저녁에는 장사를 하고, 밤에는 이불을 펴고 잤다. 샤워도 주방에 연결되어 있는 냉수로 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학교를 마치면 부모님과 가게에서 있으면서 일도 도우고 같이 놀기도 했다. 그래서 식당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일까지 기억이 난다.


거의 매일 대부 업체의 사람이 찾아와 밀린 돈을 받아가기 위해 기다렸다. 손님이 만 원을 계산하면 대부 업체 직원이 옆에 앉아 보고 있다가 그 돈을 가져갔다. 오만 원을 받으면 또 오만 원을 가져갔다. 이런 일은 매일매일 반복되었다.


© Chronomarchie, 출처 Pixabay


그 당시 바쁘셨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에게 종종 마트에 가서 외상으로 재료를 사 오라고 시키곤 하셨는데, 어렸던 나는 그 일이 힘들어서 짜증을 많이 부렸다. 


마트까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외상값을 달라는 말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물건을 계산 할 때마다 마트 직원분은 지금까지의 외상 금액을 알려주며 빨리 돈을 가져와야 한다고 나에게 말했고, 나는 창피해서 숨고 싶었다. 


친구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더 살 게 있는것처럼 마트를 빙빙 돌았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어머니, 아버지가 오죽 지치고 힘들었으면 어린 나에게 부탁했을까 싶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그 당시 심한 우울증을 앓고 계셨다. 극단적인 생각도 많이 하셨다는데, 약을 먹으면서 꾸역꾸역 버티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겐 전혀 내색하지 않으셔서 그 정도로 심각했었는지 몰랐다. 


© Free-Photos, 출처 Pixabay


현재는 부모님이 장사를 그만두신지 10년이 가까이 되어간다. 하지만 지금도 어머니는 예전에 우리가 장사하며 살았던 그 건물을 지날 때면 고개를 돌리신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워서 보기 힘들다고 하시면서….



빚을 모두 청산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1996년부터 음식점을 하면서 보증 빚을 갚아나갔고, 2013년도에 건물을 팔아서 가까스로 모든 대출을 청산했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15년 넘게 일하셨고, 부모님 두 분이 함께 18년 동안 칼국수 장사를 하셨다. 이후 건물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다 팔았을 때, 부모님 수중에는 500만 원 정도의 돈이 남았다. 


빚보증으로 인해 30년 넘게 일을 하고 남은 것은 겨우 500만 원이었다. 그리고 40대였던 부모님은 60대의 나이가 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도 집이 팔렸을 때 다 같이 정말 기뻐했었다. 지긋지긋한 빚의 늪에서 겨우겨우 빠져나온 부모님은 많이 우셨다. 그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을 버텨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그 뒤로 부모님은 친구분의 비어있는 집에서 임시로 지내시다가 1편의 내용에서처럼 내 돈을 합쳐 작은 아파트를 구입하셨다. 


아버지는 가게를 정리하신 후 청소부로 일하시다가 최근에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하신다. 어머니는 관절이 좋지 않으셔서 집에서 쉬고 계신다. 


© andjela_stamenkovic, 출처 Unsplash


이 18년의 기간 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사업이 성공해서 모든 빚을 청산하지도 못했고, 도움받을 사람도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 버티면서 지내는, 끊임없는 절망의 시기였다. 


물론 빚을 다 갚은 이후 바로 장밋빛 현실이 펼쳐진 것도 아니다. 거주할 집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대출을 했고 우리 가족은 통장 잔고 0원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계획하지 않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주어진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하고 하나씩 바꿔나간다. 목표가 불확실하더라도 계획을 수정하면서 실행해 나간다. 힘들면 잠깐 쉬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으로 오늘의 하루를 10년 뒤 미래의 나에게 선물한다.




... 3편에서 이어집니다.


☞ 3편. 가난은 어린 나에게 변명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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