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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김무명 Jan 22. 2021

#3. 가난은 어린 나에게 변명을 가르쳤다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는 아이

2편에서 가난의 연대기를 쓰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3편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빚보증으로 집의 경제적 상황이 크게 기울어진 이후, 내가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려고 한다.      

     

어제부터 여태 없던 편두통이 생겼다. 스트레스받았던 기억들을 글로 써나가다 보니 그런 건지, 최근 생긴 목의 염증이 머리 쪽 통증으로 이어진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나를 돌아보고,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들이 의미 있는 과정으로 느껴진다.


© tonny_tran, 출처 Unsplash

또한 앞으로 우리 부부가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면, 부모로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아이를 키워내야 할지,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일지 등, 다시 한번 자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는 아이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어린이날 선물로 로봇 장난감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이렇게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어린이날 선물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이때부터 나는 부모님께 무언가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상황을 대충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못 사고 못 먹을 걸 알아서인지, 갖고 싶거나 먹고 싶은 것들이 거의 없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12년 동안, 교복을 제외하고 부모님께서 옷 가게에서 옷을 사주신 적이 딱 두 번 있다. 어디에서 얼마에 샀는지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 jordannix, 출처 Unsplash

    

두 벌 다 중학생 때 아버지와 사러 갔었다. 하나는 동네에 있는 옷 가게에서 산 오리털 패딩 잠바였고, 나머지 하나는 대형마트 할인 코너에서 산 청바지였다.      

     

우리 가족에게는 구입을 할 때, 옷의 품질보다는 가격표의 숫자가 작은 것이 중요했다. 그때는 단 돈 몇 만 원이 얼마나 크게 느껴졌는지, 아버지와 덜덜 떨면서 옷을 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입는 대부분의 옷은 친척분이 보내주신 옷이었다. 속옷이나 양말 등은 바자회나 벼룩시장에서 부모님이 사 오셨다. 친척집에서 보내주신 옷은 대부분 몸에 비해 많이 컸지만, 부모님이 말하기를 난 어떤 옷이든지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부모님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셨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늘 당당했다. 또한 당당하려고 노력했다.     

     

고등학교 때는 노스페이스 바람막이와 패딩이 유행이었다. 교복 재킷 안에 입는 후드 집업도 사고 싶었던 때가 있었지만, 부모님께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뭘 입어도 당당하고 잘 어울린다고 스스로를 다독였고, 유행을 좇는 문화를 비판하면서 나를 지켰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부모님 지인분이 운영하는 음식점에 가서 외식을 했다. 같이 장사를 하는 입장이라 팔아줄 겸 들르곤 했는데, 어머니, 아버지는 고기를 굽기만 하고 거의 드시지를 않았다. 회를 먹으러 가도 샐러드와 야채만 드셨다.


© adiosmary, 출처 Pixabay

그럴 때마다 부모님 보고 좀 드시라고 화도 내고, 고기를 몇 점 집어서 그릇에 옮겨드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도 외식을 하러 가면 여전히 잘 안 드시고 나를 먹이려고만 하신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아내와 식당을 가면 아내가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나한테는 당연하지 않은 일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반 친구 한 명이 방학 때 부모님과 옷을 산 이야기를 했다.      

     

20만 원 정도의 옷을 샀다고 하면서 친구들에게 별거 아닌 듯 이야기했는데 나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 이야기가 그때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날 만큼 그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옷 가게에 가서 옷을 사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친척분이 보내준 옷을 입거나 어머니, 아버지가 어디서 가져온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옷을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가게에서 옷을 사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 alexandermils, 출처 Unsplash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친구들도 나처럼 크게 놀랐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대부분 무덤덤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집이 조금 특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신발을 사는 일도 그랬고, 외식을 하는 일도 조금 달랐다. 친구들에게는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학원을 다닐 때에도 시범 수업을 듣다가 그만두기 일쑤였고, 학원비를 못 낸 상태로 한 달을 다녔던 적도 있다. 교복을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고, 중·고등학생 시절 급식비와 등록비를 제 때 내본 적이 없다. 돈이 필요한 일들은 내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가난은 나에게 변명하는 법을 가르쳤다     

     


부모님은 작은 돈이라도 생기면 날 교육하려고 하셨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돈이 들어가는 일은 조금씩 많아졌다. 학원도 다니게 하고싶어 하셨지만, 학원비를 낼 수 없어 한두달이면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변명을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학교나 학원에서 독촉을 받으면 "집에 봉투를 깜빡하고 두고 왔어요. 내일은 가져올게요."라든지 "아빠가 보냈다고 했는데 오늘 집에 가서 한번 확인해볼게요."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계속할 때마다 뻔뻔해지는 것이 아니라 위축됐다. 당당하게 행동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합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들도 요구하기가 어려워졌고, 나의 권리가 침해받더라도 우물쭈물 망설였다. 대신 상대방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하게 됐고, 친구들 사이의 작은 부탁도 거절하기 어려워졌다.           

© craftedbygc, 출처 Unsplash


고3 때 수학 과외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돈을 내지 못해 그만두게 되었다. 과외 선생님으로부터 밀린 2주 치 수업료를 달라는 전화를 몇 번 받고 나서, 죄송한데 정말 드릴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사정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그 대학생 선생님도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했을까. 제대로 비용을 지불하지 못한 모든 분들께 지금이라도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     

 



학창 시절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살얼음판 위를 걷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다. 공부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하지만 힘든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악바리 정신이 있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할 때 이를 악물고 끈질기게 매달렸고,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얻은 교훈과 태도, 습관들은 지금은 더욱 강화되어 나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가치 있는 것들은 결코 쉽게, 짧은 시간 안에 얻어지지 않는다. 성취하는 방법은 모두 알고 있지만 제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끈질기게 노력하는 사람은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 4편에서 이어집니다.


4편. 초등학생 알바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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