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땅 위의 일상
2011년 2월 22일, 아내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었다. 오후 수업을 나가기 전이라 했다. 전화기 너머로 나갈 채비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내가 말을 멈췄다. "어머, 왜 이래, 악—"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다시 걸었다. 연결되지 않았다. 또 걸었다. 또. 또. 신호음만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신호음도 나지 않았다.
뉴스 검색을 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세 시간 지난 다음 짧은 몇 줄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대규모 지진 발생'이라고 뉴스에 나왔다. 손이 떨렸다. 크라이스트처치 한인회에 전화가 된 것은 다음 날이었다. "다행히 사망자 명단에는 없습니다. 괜찮으실 겁니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명단에 없다는 것과 무사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외국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아내가 공중전화로 전화를 했다. "나 별일 없어." "홈스테이 집은 많이 파손되어 살 수 없어서, 아주머니와 좀 떨어진 랭기오라 집으로 왔어." "여긴 계속 여진이 일어나고 있어." 아내가 말했다.
나는 아내가 걱정되어 뉴질랜드로 향했다.
아내는 휴강한 학교가 다시 개강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하지만 땅은 멈추지 않았다. 하루에도 십여 번 계속되는 여진. 여진은 몇 개월간 지속되었다.
저 멀리서 우르륵— 하며 소리가 난다. 멀리서 진동이 느껴진다. 그 진동과 소리는 가까이 온다. 내가 있는 곳을 심하게 흔든다 우르륵—쿵—. 짧게는 5초, 길게는 10초 정도, 그리고 다시 먼 곳으로 간다. 그 진동이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진다.
그게 반복되면 몸으로 느낀다. 이번에는 괜찮다는 것을. 어느 정도 규모인지, 얼마나 지속될지. 몸이 먼저 안다. 하지만 어느 날은 진동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흔들림이 심해지면, 밖으로 뛰어나간다. 가끔 큰 여진이 온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본 크라이스트처치는 평화로웠다. 무너진 대성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봤다. 뉴질랜드 키위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런데 며칠을 그 도시에서 지내다 보니,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저들은 여기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땅이 흔들려도, 건물이 무너져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카페는 커피를 팔았다. 사람들은 출근했다. 슬픔을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삶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귀국하는 날, 아내는 공항에서 배웅했다. 여진이 아직 계속되는 도시에서, 개강한 학교로 돌아가는 아내를 남겨두고. 나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돌아봤다. 아내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손을 오래 바라봤다. 일주일 후 공중전화 너머로 들려왔던 그 목소리가 생각났다. 나 별일 없어. 괜찮아.
우리는 모두 어느 날 갑자기 흔들리는 땅 위에 서게 된다. 전화가 끊기고, 신호음도 사라지는 날이 온다. 그래도 그 다음 날이 오면, 우리는 다시 눕힌 몸을 일으킨다. 밥을 먹고, 문을 열고, 나간다. 그게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평범한 하루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 날은, 가장 용감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