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선

우리가 도착한 곳에는 언제나 답이 있다.

by 온곁


나는 섬에 산다. 집에서 5분만 걸으면 바다가 나온다. 이 말을 누군가에게 말했을 때, 상대방은 으레 부러움 섞인 감탄사를 내뱉곤 한다. "와, 좋겠다." 나는 애매하게 웃는다. 좋은 건 맞지만, 내가 생각했던 그런 좋음은 아니었다.


내가 자란 곳은 청주다. 우리나라 중심쯤에 있는, 바다와는 먼 내륙 도시. 초등학교 6학년, 태어나서 12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동해바다를 봤다. 버스에서 내려 백사장을 향해 달려가던 순간을 기억한다. 파도 소리가 점점 커지고, 짠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때 본 바다는 신비롭고 낯설고 압도적이었다. 나는 그저 여행자였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결혼하고 여러 사유가 겹쳐 이곳 섬까지 오게 되었다. 사유라는 건 대개 그렇듯, 선택이라기보다 흘러온 결과에 가까웠다. 처음엔 낯설었다. 바다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푸름, 바람에 섞인 습한 공기, 갈매기 날갯짓이 일상이 되어갔을 뿐이다. 바다는 풍경이었다. 아직 삶은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바다는 달라졌다. 아이는 바다를 좋아한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파도를 향해 뒤뚱거리며 걸었다. 지금은 일주일에 두 번쯤, 아이를 데리고 바다로 향한다. 거기서 우리는 걷거나 조개껍질을 줍거나 작은 게를 구경한다. 아이는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깔깔대고, 나는 그 웃음소리에 섞여 파도 소리를 듣는다. 바다는 그렇게 풍경에서 일상으로, 일상에서 관계로 스며들었다.


가까이서 경험하는 바다는 거칠다. 바람이 세게 불면 몸이 휘청거리고, 파도가 거세게 부딪치는 날엔 진이 빠질 정도로 강한 힘을 느낀다. 바다는 낭만이 아니다. 살아 있다. 숨 쉬고, 울고, 때로는 화를 낸다. 그 앞에 서면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이 작아짐이 불쾌하지 않은 건, 그게 나를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다 앞에서 나는 그저 한 사람이다. 누군가 아빠도, 누군가 남편도 아닌, 그냥 한 사람.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면 바다는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백사장 끝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안도감이 밀려온다. 저 수평선은 언제나 거기 있다. 내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도. 변함없이 수평으로 누워 있다. 그 한결같음이 평안하다. 내 삶이 어지럽고 불안해도, 저 선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그게 위로가 된다.


요즘 아이와 바다에 갈 때면, 나는 수평선을 오래 지켜본다. 아이는 발밑 조약돌을 던지고, 나는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선을 본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청주에서 자란 내가, 바다를 꿈도 꾸지 않았던 내가, 지금 이 섬에서 아이와 함께 바다를 보고 있다는 사실. 인생이란 게 참 이상하다.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위로를 받는다.


가까우면서도 끝없이 먼 이 공간. 나는 이제 안다. 바다는 그저 거기 있는 게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지친 날에도, 평범한 날에도, 기쁜 날에도.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수평선. 그 선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살면서 필요한 건 거창한 답이 아니라, 이런 수평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흔들리지 않는 선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바다는 그렇게 말없이, 나를 위로한다.



인생은 종종 우리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그 낯선 곳에,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흔들리지 않는 선'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