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연재를 하면서 구체적인 이혼사유를 직접적으로 얘기하진 않았다. (전)남편의 흉을 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혹은 이혼 후 상대방의 잘못이나 탓하고 있는 못난이처럼 보일 거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나는 (전)남편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연이 된다면 나보다 좋은 분을 만나서 잘 살길 바라기 때문에 괜히 그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건 아닐까 염려됐다.
하지만 내가 우리의 이야기를 쓰기로 한 가장 큰 이유가 우리처럼 이혼하는 분들이 없길 바라는 마음인데, 구체적인 도움을 드리는 게 아닌 두루뭉술한 원론적인 얘기만 한 건 아닐지, 어쩌면 가장 가려운 곳이자 핵심내용을 빼고 주변만 벅벅 긁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껏 글을 읽어주신 분이라면, 내가 우리의 이혼사유에 대해 남편 탓만 하는 게 아닌, 내 탓도 크다며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테니 오늘은 조금 구체적으로 내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한다. 사실 정확하게 이것 때문에 이혼했다 하기엔 참 복잡다단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중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으로 이혼을 결심하게 한 2가지에 대해서만 언급하려 한다.
남편은 화가 나지 않았을 때는 최고의 남편이었다. 자상하고, 재밌고, 요리도 잘하고, 가정적이고, 돈도 잘 벌고, 일도 열심히 하고, 책임감 있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그런 완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하면 그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욕을 하고, 심한 말을 내뱉고, 분이 안 풀린다며 깨물어 멍이 들게 했다.
혹은 여행을 가서 다투었는데 기분이 상했다고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혼자 버스 타고 집으로 가버렸다. 전화도 안 받아서 홀로 남편을 찾아 헤매다 카드앱으로 남편의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보고 집에 갔다는 것을 알았다.
연애할 때는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연애 기간이 짧았기도 했고, 여행도 한 번 밖에 안 가봤고, 내가 대학원일로 바쁘다 보니 매번 남편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도서관 데이트를 했다. 그래서 남편의 다양한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고, 남편은 주로 참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큰 싸움 없이 지낼 수 있던 거 같다.
하지만 결혼을 하니 나는 소중한 연인에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가족이 됐고, 감정이 상하면 가족만도 못한 사람이 됐다. 화난다고 짜증 난다고 그 감정들을 필터링 하나 없이 나에게 마구 내던져 버리는 그것을 난 온몸으로 받아내며 속상해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작년 3월에 엄마가 눈길에 미끄러져 팔이 부러지셨고, 큰 수술을 받은 뒤 처음으로 문병을 가는 길이었다. 혼자서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씻는 것도 어려운 엄마를 위해 한 달 정도 내가 친정에 머물기로 한 상황이었다. 서울 가는 길 차 안에서 우리는 말다툼을 했고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그는 쿵쾅거리며 내 한 달치 짐을 옮기면서 화가 난다고 엄마를 보고도 안부조차 묻지 않은 채 그대로 대전으로 돌아가버렸다.
우리 부모님은 남편을 참 좋아했다. 내가 대학원생활을 할 때 남편이 서툴게나마 요리를 배우며 나를 챙겨준 것을 두고두고 고마워하셨고, 부족하고 철부지 같은 딸내미 보살피느라 고생이 많다며 늘 남편 편에 서서 나를 나무랐다. 나랑은 싸웠으니까 그렇다 쳐도 부모님을 그렇게 무시하고 가는 모습을 보니 5년 전 처음으로 화난다고 멋대로 행동할 때의 모습에서 전혀 나아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더 이상의 개선은 없겠다. 여기까지다. 5년간 열렸다 닫혔다 갈피를 못 잡던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혔다.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화가 나고, 기분이 상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자신의 분노를 조절할 줄 모르는 배우자와 사는 것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괴물과 사는 기분이고, 늘 조마조마한 마음과 시간이 지나도 쌓이지 못하는 신뢰를 바탕으로 위태로운 결혼생활이 이어진다. '감정'은 내 마음대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기에 저지르고 나면 늘 후회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남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서 결혼 전에 이 사람이 화났을 때, 기분이 언짢을 때 어떤 행동과 언어를 쓰는지, 술 먹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꼭 봐야 한다. 남편의 과격한 성향은 술을 먹으면 훨씬 심해졌다. 와인을 마시며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다 갑자기 벌어진 말다툼으로 그해의 크리스마스는 경찰의 출동과 함께 나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기고 평생 잊지 못할 악몽이 되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을 땐 대체적으로 다 좋은 사람이다. 기분이 상했을 때도 나를 소중히 여기고, 예의를 지키고, 함부로 말하지 않고, 화를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함께해야 안정감을 느끼며 가정을 키워나갈 수 있다.
이혼을 하기로 하고 마침 한 달간 친정에서 지냈을 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흔들렸다. 남편도 미안하다며 나를 설득했다. 나라고 잘한 것만 있었겠나. 못해준 것, 미안한 것들이 생각나면서 '이혼만이 정답일까..?' 갈팡질팡했다.
그때 '글배우'님의 글을 보고 이런 마음의 소용돌이가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결국 남편과 헤어져야 하는 운명이었다고 정리가 되면서 여러 미련들이 사그라들었다.
인생은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운동을 좋아하는 데 운동을 좋아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당신은 좋아하는 것을 하는 내내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것입니다.
원래는 운동을 더 잘할 수 있고 더 건강한 몸을 만들 수 있지만 당신이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당신이 잘할 수 있는 걸 잘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리를 두면 좋은 5가지 사람 | 글배우 블로그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당신은 좋아하는 것을 하는 내내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것입니다."
이 부분이 내가 왜 그렇게 대학원을 그만두고부터 결혼생활이 불행하고 힘들었는지 많은 것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나는 나를 좋아했고, 내 삶의 방식을 좋아했지만 그렇지 않은 남편 때문에 마음 한편으로 늘 불편하고, 괴로웠다.
(전) 남편과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다. MBTI도 정반대고, 성격과 성향, 인생의 목표와 취향까지 모두 달랐다. 서로의 다름에 끌려 결혼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우리가 5년 가까이 함께 잘 살 수 있었던 건 심하게 잘 맞는 '개그 코드'와 점차 맞춰가며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보다 많이 맞춰졌고, 좋아진 부분도 많았다. 부부 상담을 통해 개선된 점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남편은 내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싫어했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던 나와 달리, 남편은 내가 그만두는 것을 계속 만류했다. 우울증 증상으로 잠시 휴학을 요청했으나 반 협박조로 거부하는 교수님께 그만두겠다고 말한 날, 남편은 자신의 허락 없이 결정을 내렸다며 화를 내곤 함께 저녁을 먹던 식당에 나를 혼자 두고 시댁으로 가버렸다.
대전으로 내려온 후에도 부부 싸움 중 "이럴 거면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종종 했고, 백수로 지내며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하기도 했다. 응원을 바라는 건 사치였고, 대신 당장 뭔가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만 있었다.
남편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안정적인 생활과 경제적 안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고, 나는 삶의 재미와 도전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니 이상적인 삶에 대한 바람이 너무 달랐다.
남편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 또한 남편을 위해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 양보하지 못한 채 갈등만 깊어졌다. 어쩌면 사랑이 부족해서 양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애초에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힘들게 한 것일 수도 있다.
글배우 님의 글을 읽으며 다시금 '지금이라도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실제로 이혼하지 않고 계속 함께 살았다면, 우린 서로의 삶의 방식을 부정하며 끝없이 서로를 힘들게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배우자를 선택할 때 다른 조건보다도 삶의 방향성에 대해 깊이 이야기해 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어떤 삶을 사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는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재미인지 안정감인지, 경제적 자유인지 명예인지 등—삶의 방향성에 대해 충분히 대화를 나눠봐야 평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너무 다르면 함께 걸어갈 수 없다는 걸 우린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화가 났을 때와 아닐 때의 태도가 다르지 않은 사람, 나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같은 사람. 이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해도 나머지는 충분히 맞춰가면서 살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결혼 전에 다른 건 몰라도 이 두 가지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히 알고 결혼한다면, 헤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결혼생활로 이어질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