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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부둥켜안고 울었고, 이혼은 잊혀졌다

by 온호류


(이전 화에서 이어집니다)


2022년 1월 8일 토요일. 세 번째 상담 (3시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전)남편의 울부짖음과 진정되지 않던 흐느낌은 어느새 잦아들어 상담선생님과의 나지막한 대화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나도 겨우 울음이 막 멎은 참이라 아직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상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상담선생님께서 내가 있는 방 문을 열고 들어와 이쪽으로 오라고 하셨다. 나는 몇 자 기록하지 못한 다이어리와 눈물 콧물을 닦느라 사용한 휴지 더미를 주섬주섬 가방에 넣고 남편이 있는 방으로 갔다.


남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의 옆에도 구겨진 휴지 뭉치가 여럿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자 순간 또 울컥했다. 이제 보니 상담선생님의 눈가 역시 촉촉했다. 둘이 무슨 얘길 나눈 건지,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궁금했다.


"옆방에서 무슨 생각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묻고 싶은 건 나였는데 상담선생님이 먼저 내게 물었다.


"남편이 우는소리를 들었어요. 저도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오더라구요. 지금 저희 상황이나 남편에 대한 미움이 생각나기보단 그냥 가서 꼭 안아주고 싶었어요."


나는 말하면서 울먹거렸다.


“그럼 안아주세요.”


선생님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고 나는 천천히 남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님아…. 왜 그렇게 울었어~"


'님'은 우리가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다. 어쩌다 보니 꽤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님이었다. 나는 남편을 안으면서 울음을 터트렸고 남편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울면서 말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다신 상처 주지 않을게. 한 번만 기회를 줘. 나 버리지 마.”


우린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서로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하며 울었다.

상담선생님도 조용히 눈물을 훔치셨다.





이날은 상담 기록이 없다. 기록할 만한 정신이 없었나 보다.

너무 많이 울었고,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 버티고 서있기만 해도 벅찼다.


상담을 끝내고 나오니 3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남편 홀로 두 시간, 둘이 함께 한 시간을 얘기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남편은 깊이 뉘우치고 있었고 상담선생님은 한 번만 믿어보자 했다. 셋이서 변화를 만들어가 보자고.


우리는 기진맥진해서 둘 다 빈속인데도 불구하고 밥맛이 없었다. 뭔가 먹었다간 바로 체할 거 같았지만 걸을 힘조차 없어서 도로 반대편에 보이는 본죽에서 죽을 먹기로 했다. 원래도 호박죽을 좋아했지만 그날 먹은 호박죽은 유독 달달했다. 지쳐있는 몸에 노오란 호박죽이 수혈되면서 에너지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당이 충전되니 잠자코 있던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아까 상담선생님이랑 무슨 얘기했어~?”


남편은 담담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었다.

들어보니 상담선생님께서 남편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마치 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서 나오는 연극 치료와 같은 거였나 보다.


남편이 나에게 쉽게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풀지 못한 가족에 대한 분노가 쌓여 나에게까지 번지는 거라고 첫 번째 상담에서 말씀해 주셨었다.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거의 듣지 못했으니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버지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이 아버지 입장에서 말을 건네주셨다고 했다.


"아들, 그렇게 먼저 가서 미안해. 혼자 엄마랑 동생 돌보느라 힘들었지. 아내랑 예쁘게 잘 살고 있는 거 보니까 아빤 정말 행복하다. 아빠가 너한테 해준 건 없고 짐만 된 거 같아서 미안해. 늘 얘기하고 싶었어. 사과하고 싶었어. 네가 아빠를 너무 차갑게 외면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단다. 못난 아버지를 용서해 줘. 미안하다."


남편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는데 사과받지 못하고 갈등을 풀지 못한 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 하는 마음과 왠지 모를 죄책감이 더해져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응어리진 감정을 속에 품고 지냈던 거 같다.



"감정은 절대 그냥 사라지지 않아요."


상담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 지금까지도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는 말이다.

어떤 감정이든 시간이 지난다고 그냥 소멸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 감정의 존재를 알아차려주고 이해해 줘야 비로소 그 감정은 한을 풀고 소멸될 수 있다는 뜻일 거다.


남편 안에 쌓인 분노와 상처는 오랜 시간 외면받아왔다. 마치 드라마에서 귀신이 오랫동안 한을 품고 승천하지 못하면 악령이 되듯 남편의 분노도 그 속에서 곪아 악한 기운이 생긴 게 아닐까?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해 본 사람은 알 거다. 미워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괴롭히고 좀먹게 한다. 괜히 '나를 위해' 용서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타인도 아니고 자신을 낳아주신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살았으니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남편의 속은 엉망진창이었을 거다.


남편은 이렇게 역할극을 통해서라도 아버지에게 못 했던 말들을 내뱉으며 분노를 표출하고, 상담선생님의 입을 통해서라도 미안하다는 말과 아버지의 진심을 전해 들으니 전부는 아니어도 원망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감소되고 후련해진 기분이라고 했다.




오늘 길에 커피(반려견 경태 입양 전 이름)가 있는 보호소에 들러 같이 산책을 했다. 계속 반대해 오던 남편은 크리스마스 사건 이후 입양을 허락했지만 아직은 아니라며 입양을 보류해놓고 있는 상태였다.

남편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내일 경태 데리러 오자."

"뭐? 이렇게 빨리? 괜찮겠어? 나야 좋지!"

"응, 어차피 데려올 거면 빨리 데려오자. 너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진작 허락해 줄걸…."


남편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남편의 이런 친절과 배려가 일시적인 건지 앞으로 쭉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상담의 효과로 커피의 입양이 당겨진 건 분명했다. 우리는 커피를 다시 보호소에 맡기며 내일 정식으로 입양하러 오겠다고 보호소 측에 전했다.



커피로의 마지막 산책


손을 꼭 잡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오랜만에 꼭 껴안고 잠이 들면서도, 다음날 밥을 먹고 함께 소파에 기대 쉬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희망찬 미래를 그렸다. 평소에는 비난이 난무했지만 이 날은 미안하고 고마운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었다. 둘이 이혼을 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어느새 잊혀져 있었다.


상담실 벽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함께 울면서 깨달았다. 나는 아직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싶어 한다고. 남편은 가시 돋친 장미와도 같아서 껴안으려 할수록 나도 아프지만 그럼에도 꽃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아픔을 견뎌내는 것 또한 아름답지 않을까?


심각했던 이혼 위기와 세 번의 상담을 통해 남편은 부정해 왔던 본인의 가시를 보게 됐고 나에게 박혀있는 자신의 가시를 보았다. 이제는 나를 찌르지 않겠노라, 여태껏 나에게 받은 사랑을 갚으며 살겠노라 했던 그의 다짐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장미의 가시까지 사랑했던 거구나 깨달았으니 따가움을 좀 더 견뎌보자고 다짐했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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