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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될 뻔한 세 번째 상담, 남편의 오열

by 온호류


(이전 화에서 이어집니다)


2022년 1월 6일 목요일. 개인 상담 (1시간 반)


상담선생님은 깊게 생각에 잠기시더니 어렵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이게 참 어려워요.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 상담을 통해 개선된 사례가 있었다고 한들 남편분이 달라질 거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례가 없었다고 해서 남편분이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도 없죠. 사람과 상황이 다르고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두려워하시는 마음을 알기 때문에 좀 더 상담을 받아보라 권하기도 뭐 하고, 알아서 결정하시라고 이 어려운 선택을 마냥 떠넘길 수도 없어서 저도 참 어렵네요."


선생님은 한 마디, 한 마디 주머니에서 날카로운 무기를 꺼내듯 신중을 기해 말을 꺼내셨다.


"다만 제가 해드리고 싶은 말은, 제가 볼 때 남편분은 가능성이 보여요. 스스로 변화하고 싶어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해요. 아내분을 많이 사랑하구요. 본인의 감정을 돌보는 법도 모른 채 방치하고 살아서 감정을 알아차리고 조절하는데 미숙한 부분이 있는 건 맞지만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순간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나는 선생님의 조언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남편을 용서하고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냐는 질문에 대한 확답 혹은 응원이 듣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특히나 아내분이 그런 남편분을 도와줄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라 더욱 가능성이 보여요. 아내분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저는 두 분을 보면서 둘이 이렇게 맺어진 것도 운명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만큼 남편분에겐 아내분이 필요하고, 아내분은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상담이, 상담자의 역할이 내담자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정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을 뿐 답은 이미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좋은 상담자는 잘 들어주면서 예리한 질문을 통해 속에 있는 마음을 잘 끄집어내 정리해 주는 사람이고, 좋은 상담은 그로 인해 내 안에 있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함으로써 원하는 것과 원하는 방향을, 즉 내가 선택하고 싶은 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 상담은 좋은 상담이었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미 답은 내려져있었는데 그저 확신이 없을 뿐이었다. 상담을 끝내고 나오는 순간 느꼈다. 아마 선생님이 결사반대했어도 결국엔 (전) 남편 손을 잡고 토요일에 잡혀있는 상담에서 선생님을 마주했을 거다. 고민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생각하고 있던 거 같다. 상담을 조금 더 받아보고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땐 진짜 각자의 길을 가자고.


상담 끝나고 오는 길 예뻤던 하늘


다음 날 집에 들를 일이 있어 남편과 마주쳤다. 제발 자기를 지우지 말아 달라며 매달리던 남편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태도는 다시 퉁명스러워져 있었다.


"수요일까지만 해도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그러더니 왜, 또 마음이 바뀌었어? 자존심 상해 못해먹겠어?"

"왜 그렇게 말해?"

"진짜 잘못을 깨닫고 변한 건가? 한번 기회를 줘볼까 하다가도 너 그런 거 보면 믿을 수가 있겠어? 나는 내가 뭘 잘못한지도 모르면서 이혼하자고 하는 너를 3년간 어르고 달랬는데, 고작 3일 매달리고 포기해 버리는 너를 어떻게 믿어? 그 정도 각오로 뭘 잘해보겠다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힘들어서 그래.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빨리 선택을 해줘.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어. 난 너 못 믿겠고 자신도 없어. 합의한 대로 이혼해."


어제 상담을 마치고 나왔을 땐 분명 마지막으로 노력해 봐야겠다 생각했었는데 남편의 냉랭한 태도를 보니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수없이 사과하고 앞으로는 안 하겠다, 잘하겠다 약속했던 남편의 지난 말들이 생각났다. 나는 일부러 심하게 얘기했고, 남편을 도발했다.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모질게 굴어도 이젠 자신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노력해 볼 마음이 있는 건지, 이번에는 진짜 인지 아님 이번에도 위기를 넘기기 위해 그냥 하는 소리인지 말이다.


남편에게 차가운 태도로 쏘아붙이듯 얘기하고 나와 친구네 가서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역시나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남편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고, 내일 잡혀있는 상담에 같이 가라는 외침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혼은 단단한 쇠사슬이 한순간에 끊어지듯 헤어지게 되는 게 아니었다. 잘 녹은 모짜렐라 치즈를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실타래 같은 치즈 가닥이 늘어지고 또 늘어지듯, 얇은 실처럼 끈질기게 이어진 상태로 한참을 지내다 마침내 진짜 두 덩이가 되는 일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꽤나 질 좋은 치즈였나 보다. 식으면 뚝뚝 끊기는 게 아니라 꽤나 질기게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늦은 저녁 친구에게 오늘 밤이 마지막 밤임을 고했다. 내일 같이 상담을 가서 화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딱 올해까지만 상담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노력해 보겠노라고 선언했다. 친구는 그 결정 또한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었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거나 힘든 일 있으면 다시 오라고.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닭발과 맥주를 먹으며 우리끼리 작은 환송회를 했다.



10시에 예약된 상담이라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집으로 갔다. 남편은 자고 있었다. 어젯밤 누군가와 같이 술을 먹었는지 안 치운 음식과 소주병이 식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 10분. 30분 정도 거리라 지금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자고 있는 남편을 보니 답답함이 밀려왔다. 안방 문을 열고 외쳤다.


"너 안 갈 거야?"

"너가 안 간다며."

"하……. 이런 노력조차 안 해보는 너를 내가 어떻게 믿어. 나 같으면…."


내가 남편이었다면 마지막으로 선생님한테 가서 인사라도 하자며 어떻게든 날 끌고 가서 설득시켰을 거 같다. 나는 이혼하자는 남편을 어르고 달래느라 도망가는 남편을 따라 10분 가까이 뛰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리도 쉽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니 남편 말을 믿고 다시 한번 잘해보려 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래, 혼자 계속 반성이나 해."


나는 남편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곤 현관을 나왔다. 등 뒤로 같이 가자는 남편의 말이 들렸지만 그냥 혼자 상담소로 향했다. 남편은 결국 뒤따라왔다.


상담실에 들어갈 때 나의 마음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상담을 더 받아보고 싶긴 하지만 오늘처럼 남편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로는 잘해볼 자신이 없었다. 3년간 혼자만 노력해 온 느낌이었다. 더 이상 내가 참아가며 어떻게든 해보려 발버둥 치는 건 그만하고 싶었다.




2022년 1월 8일 토요일. 세 번째 상담 (3시간)


선생님과 내가 목요일에 만난 건 남편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기에 우리는 새해 인사부터 나눴다. 두 번째 상담이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살짝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묻고 새해 덕담을 했다. 그리곤 선생님이 먼저 운을 뗐다.


"두 분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요?"


간단히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혼하기로 합의했다며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얘기했다. 아마도 목요일 상담 이후 내가 이혼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나 보다 생각하셨을 거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시면서 두 분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제 막 상담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너무 아쉽지만 그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잠깐 남편과 둘이 얘기를 나눠볼 수 있겠냐고 하셔서 괜찮다 하고는 옆방에서 기다렸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혼하겠다고 얘기했지만 계속 혼란스러운 기분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옆방에서 어떤 남자가 울부짖으며 무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다시 귀를 기울였다. 남편이었다. 엉엉 울면서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서 옆방과 마주하고 있는 벽으로 다가가 귀를 대고 숨을 죽였다.


"왜, 왜! 이제 와서!"


너무 울고 있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따져 물으며 원망 섞인 얘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남편의 울음소리. 그 소리가 날카롭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너무 서럽게 엉엉 울고 있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방금 전까지 했던 복잡한 고민, 새해 첫날의 모질고 정떨어지는 모습, 크리스마스의 악몽까지 한순간 다 사라져 버리곤 그저 당장 옆방으로 달려가 남편을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옆 상담실 벽에 귀를 대고 남편과 함께 엉엉 울었다.

혹시나 내 목소리가 옆방으로 새어 들어갈까 입을 막고 엉엉 울었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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