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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변한 남편의 태도는 나를 흔들었다

by 온호류



새해 첫날, 우리 가족이 돌아간 뒤 시작된 싸움은 이혼으로 번졌고, 다음 날 시어머니에게 이혼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별거가 시작됐다. 어머니와의 통화 후 남편과 재산 분할에 대한 얘기를 냉랭하게 나누곤 바로 밖으로 나왔다. 오후에 커피(반려견 경태의 입양 전 이름)의 산책봉사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곧장 보호소로 향했다.


남편과 경태의 입양을 두고도 많이 싸웠다. 어차피 아기 낳으면 산책도 힘들 거고, 털도 날리고, 내가 산후조리원이라도 들어가면 자기 돌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자기는 싫다고 입양을 반대해 왔다. 그러다 크리스마스 사건 이후 미안함의 표현이었는지 결국 입양을 거의 허락했다. 하지만 당장 데려오자는 건 아니어서 남편이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구커피 현경태


이날은 커피와 함께하는 네 번째 산책봉사였고, 커피는 여느 때처럼 나를 주인처럼 반겨주었다. 커피를 데리고 나와 산책을 하다가 산책코스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난 몇 주간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나아질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맞춰가는 과정일 거라고 생각하며 인내해 온 3년의 시간들이 덧없게 느껴지면서 다소 무미건조한 눈물이 흘렀다.


커피는 경태가 지금의 나를 위로하듯 긴 주둥이로 내 다리를 툭툭 치며 울지 말고 자기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기분 풀라는 듯 손을 자신의 머리 위로 이끌었다. 나는 커피가 하라는 대로 맨들맨들 따뜻한 머리를 어루만지며 남편이 없는 미래를 그렸다. 그러면서 이혼 얘기가 마무리되면 경태부터 입양하리라 다짐했다.


상황을 듣고 흔쾌히 나에게 방을 내어준 대전 친구는 우리 부부와 아주 가깝게 지냈던 터라 남편의 온도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친구는 나의 이혼 결심을 지지해 주었고 크리스마스 녹음파일을 듣고는 더욱 잘 결정했다며 나의 심란한 기분을 한결 잔잔하게 해 주었다.


아무것도 안 챙기고 그냥 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다음날 남편이 출근을 한 사이에 집으로 가 대충 짐을 쌌다. 남편의 퇴근시간이 다가와서 급히 나가려던 참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할 얘기가 있으니 집이면 잠깐 기다리라는 전화였다. 살짝 고민을 했지만 알았다고 하곤 남편을 기다렸다.



정든 식탁



남편의 태도는 너무나도 의외였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뭔가 풀 죽어있는 듯 힘없는 발걸음에 목소리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그 화가 단단히 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남편은 입을 뗐다.


"네가 나가고 많은 생각을 했는데….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은 거 같아.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내가 앞으로는 정말 잘할게."



"나를 만나서 불행하다. 이혼하고 싶다. 나 같은 애랑 못살겠다." 남편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보통 내 행동이 잘못됐고, 내가 문제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던 남편이었기에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게 낯설었다. 용서해 달라, 기회를 달라 이런 말이 남편 입에서 나오는 게 참 안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리 욕을 하고 모질게 행동해도 자신의 옆에 있겠다던 내가 이제 그만 떠난다고 하니 여러 생각이 들긴 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어제 집을 나오는 순간부터 친구집에 가기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각오를 다진 상태였다. 이젠 더 이상 남편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고 내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팔자 눈썹을 하고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애원하는 남편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편이 나를 함부로 대할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 계속 이혼생각이 울분처럼 터져 나왔었기 때문에 마치 어질러진 방을 단번에 정리한 듯 나의 머릿속은 깨끗하다 못해 청명해진 상태였다. 이젠 더 이상 남편 걱정이 아닌 내 걱정만 하고 싶었고 남편 없는 미래계획은 이미 시작됐기에 남편의 개입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난 이미 마음 굳혔어. 어머니한테 말할 정도면 너도 진심이었던 거 아니야? 그리고 계속 이혼하길 원했잖아. 너가 원하던 바인데 왜 이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거 같아. 네가 내 말을 너무 안 들어주니까 그땐 정말 힘들어서 그렇게 말한 거지만 진짜 이혼하고 싶은 건 아니었어.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맞다. 쉽사리 이혼결정을 내리지 못한 건 '남편이 나 없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연민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화났을 때의 과격한 언행과는 달리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생에서 내가 제일 중요한 나와 다르게 자기가 사는 이유가 '나'인 사람이었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우리 결혼식이고, 자기가 해준 요리를 내가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나 나를 사랑하지만 화가 나면 나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노릇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쉽사리 남편을 놓지 못했고, 남편을 이해하게 될수록 더욱 그랬다. 겉으로 보기에 이해 안 가는 행동들엔 다들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듯하다. 충분히 이혼하고도 남았을 일들이 많았지만 우리도 이혼하지 못하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생각해 볼게. 그런데 기대하진 마. 나 이제 지쳤고 널 받아줄 자신이 없어."


남편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달라며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바래다줬다.


나를 위로하던 친구네 집 고양이


나는 친구집에서 생각보다 너무 잘 지냈다. 슬프기보단 후련했던 거 같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오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남편은 잠이 안 온다며 새벽 1시에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고마운 것, 미안한 것, 본인이 어리석었던 것, 좋았던 추억 얘기 등 우리는 이렇게 끝내버릴 사이가 아니라며 또 다시 나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우린 2시간이나 통화를 했고 나는 실제로 흔들렸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남편은 저녁이면 나에게 전화를 했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제발 자기를 지우지 말라고 했다.


네이버와 유튜브에 '가정폭력 남편', '가정폭력 남편 변화', '남편의 폭력성' 이런 키워드를 검색해 보면서 폭력성을 보이던 남편이 상담을 통해 변화한 케이스가 있는지 검색해 봤다. 돌변한 남편의 태도에 내 마음은 이미 동하고 있었지만 크리스마스 사건을 떠올리면 여전히 조금 무서웠다.


검색 결과 대체적으로 폭력성은 변하는 게 아니라고, 폭력성을 보이면 헤어지는 게 답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한 이혼변호사도 말했다.

"이혼 전문 변호사라고 다 이혼을 조장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폭력성을 보이는 남편과는 무조건 이혼을 권해요. 그건 갱생이 불가하더라고요."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처음으로 저렇게까지 간절하게 애원하는데, 아직 상담도 2번밖에 안 했으니 조금 더 상담을 받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 보인 폭력성은 용서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청명했던 나의 머릿속은 또다시 복잡해졌다. 돌아오는 토요일인 1월 8일에 3번째 상담이 잡혀 있었지만 나는 상담선생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 급하게 따로 보고 싶다고.




2022년 1월 6일 목요일. 개인 상담 (1시간 반)


상담선생님과 나는 따로 마주했다. 선생님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남편과 이혼하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물었다.


"솔직히 한 번은 기회를 주고 싶어요. 이제 상담을 받기 시작했으니 조금 더 희망을 가져보고 싶은데,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폭력성은 고쳐지는 게 아니라 그러더라구요. 그게 가장 걱정이 돼요. 나중에 점점 더 심해지면 어쩌나. 나중에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지고 지금 이혼하지 않은 걸 후회하면 어쩌나. 혹시 선생님은 상담을 통해 폭력성이 없어진 사례를 보신 적이 있나요?"


상담 선생님은 깊게 생각에 잠기시더니 어렵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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