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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악몽, 그리고 두 번째 부부상담

by 온호류


"무슨 일이세요?"


그 때 위층 계단에서 경찰관 두 분이 내려오고 있었다.




경찰관을 본 순간 든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감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과 이제 막 신입으로 들어온 듯한 젊은 경찰관 두 분이 함께 오셨다.


"신고받고 왔어요."

"저희 그냥 부부싸움이에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부부싸움은 경찰관이 개입하게 돼있어요."


나는 뭐가 죄송했던 걸까. 너무 무서웠는데 와줘서 감사하다고 해야지 왜 죄송하다는 말이 먼저 나온 걸까. 연륜 있어 보이는 경찰관이 문을 두드렸고 (전)남편이 나왔다.

문을 연 남편에게 경찰관이 말했다.


"신고받고 왔는데, 말로 해결하셔야지."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 이렇게 부시고(난리를 쳤는데)."

"데려가세요."

"뭘 데려가요."


술에 취한 남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나를 데려가라며 횡설수설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한 분은 안으로 들어가시고, 밖에 있던 젊은 경찰관이 나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후 몇 번 더 물어보셨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답이 아닌 질문을 했다.


"남편에게 혹시 피해가 가는 게 있나요?"


내가 경찰관을 본 순간 느낀 두려움이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이 상황에서도 혹시나 남편에게 안 좋은 조치가 취해질까 걱정이 된 거다.




TV에서 가정폭력에 대해 나올 때, 매 맞는 아내의 단골 멘트가 있었다.

"화났을 때만 아니면 참 좋은 사람인데..."


내가 이 말을 이해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편도 화났을 때만 아니면 참 좋은 사람이었다.


부부로 지내온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남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남편의 아픈 가정사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었을 상황들에 대해. 남편도 이렇게 행동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거라며, 그가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던 상황에 대해 같이 공감하고 마음 아파하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남편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당시에는 남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글을 쓰는 지금 드는 생각은, 소름 돋게도 그 이유보단 그렇게 정당화를 해야 남편에게 이런 취급을 받으며 함께 살고 있는 내가 이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고 납득이 안 가니까.


이혼하는 건 두렵고, 마음 아프고,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이 괜찮은 것도 아니고. 이도저도 못하겠으니 선택한 방법이 남편의 폭언과 폭력성을 합리화하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합리화의 원인이 나의 드센 성격이든, 가슴 아픈 가정사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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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믿고 갈게요. 아가씨도 괜찮다고 하니까 가는 거예요. 한번 더 신고 들어오면 그땐 어쩔 수 없어. 가정법원 가야 해. 서로 참고 양보하고 도와가면서 살아야지~ 그게 부부야."

"죄송해요."

"아니 우리한테 죄송한 게 아니라 와이프분에게 죄송해야지."

"잘 화해할게요."


그렇게 연륜 있으신 경찰관은 남편에게 당부의 말씀과 함께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도 해주고 가셨다. 조용한 거실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한 종이박스 같다고 느껴졌다. 샤워를 하니 물을 머금은 박스마냥 몸이 더 무겁고 쳐져서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웠다. 그리곤 남편이 깨진 유리를 치우며 내는 쨍그랑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우리의 부부상담이 예약되어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이 있고도 한 침대에서 잠을 잤는지, 아침에 일어나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상담까지 데리고 갔는지 모르겠다. 보살이 따로 없고, 강심장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남편에 대한 나의 심정은 엄마의 마음에 가까웠던 거 같다. 이미 그때부터 싫어도 버릴 수 없는, 미우나 고우나 내가 품어야 하는 사람으로 남편을 생각했나 보다.




2021년 12월 25일 토요일. 두 번째 상담 (2시간)


*진행한 것

1. 어제 싸움이 벌어진 것에 대한 설명을 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안 싸울 거 같은지 서로 얘기함.

- 남편은 다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말을 일부 인정해 주면 화가 안 날 텐데,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반박해서 화가 난다고 했다.

2. 그림분석 (나무와 가족의 모습 그리기)

- 뿌리가 없고 가지가 있는 나무와 사람들의 웃는 얼굴, 평화로운 그림.

남편 - 뿌리가 많고 가지가 없는 나무, 얼굴표정이 없는 사람들.

3. 이마고 대화법 연습.


*상담 선생님의 분석

1. 그림분석 결과 : 남편의 나무에 뿌리가 많은 건 불안함을, 뻗어나가는 가지가 없는 것은 방향성의 부재를 뜻한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않다. 나는 반대로 뿌리가 없고 가지가 있는 나무를 그린 걸로 보아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방향성이 분명하며 해맑다. 가족에 대한 긍정적이고 화목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2. 남편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상처가 많으니 내가 보듬어주고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남편의 마음에 상처와 분노가 있다는 것을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상담을 통해 그 내면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어렴풋한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 거 같았다. 남편에 대해 알아갈수록 점점 더 그를 이해하게 되고 용서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을 겪고도 상담이 끝난 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백화점에 남편의 구두를 맡기고, 푸드코트에서 함께 탄탄멘을 먹고, 저녁엔 맥주와 남편이 좋아하는 허니버터칩을 먹으며 <해리포터와 혼혈왕자>를 봤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


나의 인생드라마인 <나의 아저씨> 중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극 중 이선균에게 해선 안될 행동을 했음에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신을 대하는 이선균에게 자신이 밉지 않냐고 아이유가 묻자 이선균이 답하는 부분이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너를 알아.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건 그 사람의 서사를 알게 된다는 거고, 그 서사를 통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 사람을 이해하면 그 사람의 좋지 못한 행동들도 그리 미워 보이지 않는다. 동정심이든 연민이든 안타까움이든 다른 사람에겐 생기지 않는 따뜻한 감정이 샘솟으면서 쉽게 용서하고 관대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남편을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너무 깊이 이해해 버렸다. 지금은 이혼을 했고 시간이 지나 복잡한 감정들이 사그라졌기 때문에 말할 수 있지만, 당시 남편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었고 남편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고 정당화시켜 버렸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남편의 행태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못했다. 가족들 중 누구도 내가 이혼하겠다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이런 남편의 모습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사건 이후 나의 마음엔 어떤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많은 것을 정당화시켜 왔지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하거나 이 정도로 두려움에 떨게 한 적은 없었으니까 나도 꽤나 충격을 먹었나 보다. 하지만 12월 31일에 부모님과 언니부부가 처음으로 대전 신혼집에 놀러 와 하루 자고 가기로 한 상태였기 때문에 복잡한 마음은 일단 봉인해 둔 채로 일주일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봉인해 둔 마음은 결국 터져버렸고, 가족이 다녀간 뒤 우린 마침내 이혼하기로 합의했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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