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상담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우리 사이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마치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처럼 애틋함이 되살아났고, 서로를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이렇게 상담을 받으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들여다보며 올바른 대화법을 배워간다면 우리도 싸우지 않고 모든 갈등을 사이좋게 풀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일주일 뒤로 잡은 상담이 너무 기다려졌다. 오죽 빨리 상담을 받고 싶었으면 크리스마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약을 잡았을까.
사실, 평소에 우리 사이는 꽤나 좋은 편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도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도 금슬 좋은 부부였다. 싸울 때와 아닐 때의 온도차가 좀 심하고 자주 싸워서 그렇지 실제로 사이좋은 부부이기도 했다. 나는 어느덧 그런 온도차에 익숙해져 버린 거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행복도, 불행도 금방 익숙해 지나보다. 처음엔 (전)남편이 하는 욕 한마디가 너무 속상해서 몇 날 며칠을 따져 물으며 안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곤 했는데, 어느덧 싸울 때 욕하는 건 흔한 일이 돼버렸다. 처음에는 듣기만 해도 욱신욱신했던 말이 아무렇지도 않아 졌고, 매섭게 노려보며 상처가 되는 말을 뱉은 직후여도 작은 포인트에 웃음이 터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너한테 욕 듣고 이런 취급받는 게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 싫어! 너무 서러워!"
얼마 전 싸울 때 이런 말을 하며 소리쳤지만 남편의 모습에 익숙해지는 건 살기 위한 나름의 적응이었다. 단기기억상실능력을 개발함으로써 나쁜 행동은 빛의 속도로 잊어버리고 현재의 다정함만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거다. 그 덕에 5년간의 결혼생활 중 싸울 때를 제외하고 절반 정도는 꽤 행복했다. 그리고 이 능력 덕분에 끔찍한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금세 잊어버리고 이후로도 3년을 잘 지낼 수 있었다.
사이좋게 맞이한 크리스마스이브. 믿지도 않는 예수님에게 이번에는 왜 토요일에 오셨냐며 다음에는 꼭 평일로 부탁한다는 소원을 빌고, 분위기를 한껏 신나게 하는 캐럴을 듣고, 와인과 함께 남편이 해준 파스타를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1차 파스타, 2차 치즈, 3차 치킨을 먹으며 분위가 무르익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주제로 논쟁이 벌어졌고 취기가 올라온 남편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결국 일이 터졌다.
무슨 얘기로 말다툼이 시작됐는지, 얼마나 대단한 주제길래 이런 끔찍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기억해내고 싶다. 부부싸움이란 게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시작했어도 무자비한 결말로 끝날 수 있는 거라고, 이런 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땐 조심하라고 예시를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린 왜 싸웠는가? 아마도 그건 우리가 평소에 종종 나누던 대화이고, 늘 있어왔던 의견차이고, 그리 특별한 주제가 아니었다는 뜻일 거다. 그저 나의 어떤 말이, 특정 단어가, 얼굴 표정이 남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어느 순간 남편이 욕을 하기 시작했고 싸함을 느낀 나는 그만 얘기하자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남편은 식탁 위의 와인병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분노를 쏟아냈다. 나는 순간 너무 무서워서 녹음 버튼을 눌렀다.
(쨍그랑!, 쨍그랑!)
"꺄아아아아악!"
(쨍그랑!)
"뭐 하는 거야?"
"안 걸린다고 똑같아?"
(쨍그랑!)
"안 걸린다고 똑같아? 똑같냐고! 나가, 나가 xx년아"
뭘 안 걸린단 걸까, 뭐가 똑같은 걸까? 병 깨지는 소리로 시작하는 이 아픈 음성파일의 앞부분을 여러 번 들어봐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남편은 나의 어떤 사고방식이 매우 마음에 안 드는 듯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남편은 이어 와인잔 두 개도 던져버리곤 방으로 들어와 내 멱살을 잡고 나가라며 나도 현관으로 내동댕이 쳤다.
이렇게 까지 화낸 건 처음이었다. 내 멱살을 잡은 것도 나를 내동댕이 친 것도 처음이었다. 두려웠다.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순간 '올 게 왔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이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도대체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들고선 어떻게 그 긴 결혼생활을 이어온 걸까? 사랑이라 가능했던 걸까?
늘 마음 한구석에 이혼이라는 카드를 엎어놓고 있어서였는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게 증거가 되어줄 거라 생각한 건지는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누른 녹음버튼과 그렇게 담아낸 이날의 잔상은 이혼 조정기간 동안 다시 또 흔들리는 내 마음을 잡아주었다.
남편은 오늘로 우린 끝이라며 나가라고 했고 나는 알았으니까 손대지 말라며 재빨리 방으로 들어와 짐을 챙겼다. 그러던 중 무섭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남편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그런데 남편은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왜 울어~" 하는 거 아닌가. 순간 안도감에 울음이 터진 나는 구슬프게 흐느꼈다. 남편의 화가 누그러졌나 보다 하는 생각에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져 꾹 눌러온 감정이 터져 나온 거다.
남편은 왜 우냐며 다정한 말투로 몇 번 더 물어보곤 내 앞에 그저 서있었다. 그러면서 남편은 내가 참 듣기 싫어하는 말을 했다. 차마 여기에 적을 수 없는 그 말은 남편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늘 나를 무장해제 시키곤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짐 싸서 나갈 거고, 이혼할 거야!'라고 마음먹었었지만 그 말을 듣곤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후로도 남편은 나가라고 거듭 재촉했지만 나는 발바닥이 땅에 붙은 사람처럼 울면서 우두커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화가 누그러진듯했던 남편은 갑자기 다시 내 멱살을 잡고 나가라며 나를 현관으로 밀쳐냈다. 나는 알았다고, 나간다고 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
"무슨 일이세요?"
그 때 위층 계단에서 경찰관 두 명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전 오랜만에 '크리스마의 악몽'이라 이름 지어 놓은 녹음파일을 들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생생하게 글을 쓰는데 이보다 더 좋은 타임머신이 없다. 당시의 분위기, 남편의 분노, 나의 두려움 그리고 복합적이다 못해 얽히고설킨 슬픔, 무력감, 서러움, 연민 등 한 번에 몰려와 이름 지을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귀를 타고 들어온 소리의 진동이 심장까지 전해져 가슴을 쿵쾅거리게 한다.
몇 번을 들어야 괜찮아질까? 아님 평생을 들어도 괜찮아지지 않는 걸까? 들을 때마다 나는 녹음파일 너머의 나와 함께 운다. 그곳에 있는 나는 홀로 두려움 속에 흐느끼지만 지금의 나는 반려견 경태를 불러다 있는 힘껏 껴안고 소리 내어 엉엉 운다. 거기서 그런 취급을 받고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혼자 덜덜 떨고 있는 내가 불쌍해서 울고, 당장 뛰쳐나와 이혼 결정을 내리지 않은 내가 바보 같아서 울고, 나의 동정심을 자극하던 남편의 한 마디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내가 이해가 돼서, 다시 돌아가도 남편을 두고 떠나지 못할 거 같아서, 그런 내가 답답해서 운다.
그리고 이번에는 첫 상담 후 잔뜩 행복한 미래를 그리던 내가 느꼈을 실망과 충격이 안쓰러워서 또 한 번 울었다.
-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