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원의 밤과 미지근한 온도

사랑이라는 과잉보다 존중이라는 거리감을 위하여

by 온화수

아이들이 해열제 기운에 취해 잠든 밤입니다. 낮은 플라스틱 책상 앞에 몸을 구기고 앉아 밀린 서류를 처리하다 보면, 문득 기묘한 평온이 찾아옵니다. 아이의 고통이 잠시 유예된 틈을 타 얻어낸 이 이기적인 평화는, 죄책감보다는 차라리 내일을 위한 연료에 가깝습니다. 다음 날 아이가 마주할 깨끗한 주방과 빳빳하게 마른 옷가지는 이 냉정한 몰입의 결과물일 테니까요.


최근 보육원은 독감이라는 유령과 싸우고 있습니다. 아이가 콧물만 비쳐도, 혹은 기침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도 저희는 즉각 병원으로 향합니다. 제가 자란 시대의 문법으로는 ‘과잉’이라 읽힐 법하지만, 단체 생활의 엄격한 질서와 ‘책임’이라는 무거운 외피 아래에서 개인의 경험칙은 힘을 잃습니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의사의 무미건조한 처방을 기다리며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실된 사랑의 발로일까요, 아니면 사고 발생 시 돌아올 비난을 방어하기 위한 행정적 본능일까요.


어제와 오늘, 기침이 심해진 아이 하나가 주말 오전부터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미열을 머금은 아이는 평소와 달리 슬그머니 다가와 몸을 기댑니다. 타인에게 몸을 의탁한다는 것은 생존을 향한 가장 원초적인 호소이자, 동시에 그가 가진 유일한 신뢰의 화법일지도 모릅니다. 독감에 걸린 룸메이트를 피해 숙소 내 집무실 안쪽 침대에 눕히자, 아이는 이내 고단한 잠 속으로 침잠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왜 저는 이 아이들을 보며 끓어오르는 애틋함에 젖지 않는 것일까요. 왜 저는 그저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믿는 것일까요. 기이하게도 아이들은 종종 이런 저에게로 걸어옵니다. 아마도 그것은 제가 그들을 제 감정의 배설구로 삼지 않기에 느껴지는 기묘한 해방감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거창한 수사를 쓰지 못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종종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제 멋대로 주무르려는 폭력적인 욕망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저는 그들을 '존중'하고자 합니다.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대접하고, 그들의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때로 냉랭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겉면의 차가움 아래, 저의 내면은 겉보기보다는 조금 더 미지근한 온도를 품고 있습니다. 끓어오르지도, 식어버리지도 않는 그 미지근함이야말로 이 아이들이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라나는 데 필요한 가장 안전한 온도라고 믿고 싶습니다.


서류 뭉치 위로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얹힙니다. 존중이란, 결국 상대가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허락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 저는 그 여백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어 이 이기적인 평화를 조금 더 누려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