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과적을 거부하는 법
어린 시절 친구가 많은 게 훈장인 줄 알았다. 휴대전화가 비명을 지르고, 밥 먹을 때마다 숟가락 맞부딪칠 동행이 줄을 서 있는 삶. 그것이 고독이라는 파산을 막아줄 유일한 적금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관계의 양이 아니라 관계의 소음에 예민해진다는 뜻이다. 어떤 이들이 혼자를 자처하는 이유는 인류를 증오해서가 아니다. 그저 타인의 표정을 살피느라 방전된 자기 영혼에게, 비로소 ‘자기 호흡’이라는 산소호흡기를 씌워주려는 몸부림이다.
타인과 함께한다는 건 생각보다 고된 노동이다. 상대의 기분을 맞추려 내 말투를 교정하고, 공백이 생기면 억지 웃음을 채워 넣어야 하는 고도의 감정 서비스업이다. 그 과정에서 ‘나’라는 본질은 희석되고, 어느 순간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피로감을 마주하게 된다. 반면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침묵할 권리를 얻는다. 갑자기 길가에 핀 꽃을 구경하느라 멈춰 서도 누구 하나 해명할 필요가 없는 자유.
혼자가 편한 이들은 사실 차가운 게 아니라, 지독하게 '고감도 안테나'를 가진 사람들이다. 공기의 흐름과 타인의 작은 말투 하나까지 다 읽어내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오래 머무는 건 마치 시끄러운 고출력 스피커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피로를 준다. 그들에게 고립은 사회성 부족이 아니라, 자아라는 배터리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절전 모드'인 셈이다.
이들은 관계를 가볍게 소비하기보다, 결이 맞는 한두 사람과의 ‘조용한 진심’을 원한다. 시끄러운 잔칫상의 소음보다는 차라리 혼자 먹는 식은 밥의 평온함을 택한다. 억지로 아무 관계의 톱니바퀴에 끼어들어 비명을 지르느니, 차라리 혼자라는 무게를 견디며 자기만의 온도를 지키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니 혼자가 편하다는 사람을 두고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단정 짓는 건 너무 게으른 해석이다. 그는 그저 세상이라는 정글을 충분히 겪어낸 끝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적의 거리를 찾아낸 전략가일 뿐이다.
어쩌면 혼자가 편하다는 선언은 누군가를 향한 거절이 아니라, 아무나 내 마음의 안뜰에 발을 들이게 하지 않겠다는 지극히 정중한 기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