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육아가 어렵게 느껴진 것은 주 양육자인 나의 행동과 말이 아이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엄마에게서 한 번 모진 말을 들으면, 그 좋은 모든 기억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았던,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던 나로서는 더더욱.
주변인으로부터 너는 애한테 화는 내니? 라는 말을 들으며 아이를 키워나가던 즈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은 지점에 도달했다. 워낙 고운 말로 아이를 대하다 보니, 내가 개입할 수 없는 부분, 아이가 다소 입이 거친 친구라든가, 놀리기 좋아하는 어른으로부터 듣는 툭 내뱉는 말이나 충격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왜? 왜 저 친구랑 안 놀아?
-쟤가 야, 라고 불러...
야라고 부르는 것조차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를 보며 그 때부터 다시 말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데, 아이 때처럼 꽃같은 말만 사용하지 않았다. 가끔은 아이에게 야라고 일부러 말하기도 하고, 아이에게 간혹 가다 툭툭 내뱉는 말투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가 외부로부터 받는 충격에 대해서는 아이를 감싸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이에게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태평한 태도를 보이려고 했다. 그렇다고 너무 억지로 위악적인 태도를 취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양육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얼까?
카리스마? 단호함? 공감력? 이해력?
이 모든 덕목 가운데 내가 가장 중요히 여기는 것은 일관성과 자연스러움이다.
아이를 키우는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들은 아이에게 자기가 너무 많이 화를 낸다든가,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든가 하는 소회를 때때로 풀어내곤 한다. 대체로 나는 공감을 주로 해주는 편인데,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라고 하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일단 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해서 화를 낸 행동이 정당했다는 전제하에서.
만약 오늘 그 행동에 대해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면 내일도 그 행동에 대해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 된다.
나의 유년시절을 돌이켜 봤을 때 가장 상처받았던 때는
내가 친구들에게 양보도 잘하고, 유순하고 착해서 좋다고 말했던 엄마가 내 장난감을 뺏어가는 기쎄고 야무진 사촌동생을 보았을 때 였다. 항상 내 편인줄 알았던 엄마가 뺏긴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사촌동생을 보면서 그래그래, 언니 꺼 가져가서 놀 수도 있지. 하고는 어벙벙한 나를 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고는
너도 좀 저렇게 하렴.
했을 때였다.
아 어쩌란 말이냐. 어쩔티비 어쩔냉장고. 엄마가 전부였을 시절 내가 엄마의 가장 멋지고 잘난 딸이라는 상상을 파사삭 깨버렸던 유년기의 그 충격이란. 그리고 엄마는 무조건적인 내 편이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불안감과 초조함이란.
사랑하는 아이에게 나는 엄마로서 얼마나 상냥하고 불친절할까. 어째서 아이는 대견하면서도 장난꾸러기일까.
아이에게 내가 받은 상처를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양육방식을 체득하며 자란 딸로서, 가끔 엄마로부터 받은 양육방식을 사용하곤 한다. 나는 이제 아이의 나이보다, 나를 키웠던 엄마의 나이에 더 가까워지는 양육자가 되면서 엄마의 너도 좀 저렇게 하라는 그 말을 이제서야 이해한다.
필시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잘 몰랐던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엄마도 자기 물건을 눈 앞에서 뺏기는 딸을 보며 속상했던 것도. 그리고 그러면서 ‘바보같이’ 뺏기는 나에게 주는 것도 없는 가난한 시댁에 자꾸만 뭘 드려야 하는, 그렇다고 싫단 말도 못하겠어서 결국은 맏며느리의 인생을 순응하고 감내해가고 있는 '바보같은' 자기자신의 착하고 유순한 모습도 투영했음을.
“너도 좀 저렇게 하렴.”이라는 말은 “나도 좀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었음을.
엄마도 못하는 그것을, 나는 못하지만 내 자식만큼은 했으면 좋겠다는 바담풍바람풍 정신이었음을 이제는 뼈저리게 안다.
나의 자식은 누군가에게 늘 사랑받고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는 양보도 잘해야 하면서, 자기의 이익도 챙길 줄 알아야 한다.
자랑스러운 내 아이는 자기의 또래보다 조금 똑똑하면서, 동생하고도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멋진 내 아이는 불편하고 멋진 옷도 소화하면서, 거친 외부활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매무새를 갖춰야 한다.
건강한 내 아이는 매일 아이들과 뛰어놀며 대장노릇을 하고, 감기에도 걸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말하곤 한다. 너는 소중해. 너는 엄마의 보물이야. 그렇게 얘기하고 나서,
저 친구를 봐. 너도 저렇게 하렴.
이제부터 더더욱 새로운 환경에 노출될 아이는 이모저모 역할모델과 여러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으며 점진적으로 더더욱 강해지고 더더욱 성장할 것이다. 이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바람에 쓰라리지 않게 중심을 잡도록 도와주는 뿐이다.
아, 그러나 나는 너무 약한 영혼이다. 내 조그만 손톱거스러미에도 쓰라려 끙끙 앓고 이렇게 살아야 할까, 저렇게 살아야 할까 하고 중심 잡지 못하는 엄마가 항상 아이에게 자, 너는 바람풍하렴, 너는 바람풍하렴. 한다고 될까. 오늘은 치즈떡볶이가 좋고, 내일은 황금올리브치킨이 좋은 엄마는, 항상 그 일관성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