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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Apr 27. 2023

엄마랑은 못살지만 엄마 없인 못 살아

엄마랑 하는 작별인사는 왜 이렇게 어색할까

엄마가 갔다. 엄마가 있는 아침과 없는 아침은 사뭇 다르다. 엄마가 있는 아침은 항상 청소기 소리로 시작한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있으면 아침에 된장국 냄새나 미역국 냄새가 난다는데, 우리 엄마는 요리 실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항상 해줄 수 있는 일이 청소밖에 없다는 듯이 청소기를 드르륵드르륵 민다. (물론 아침 밥상도 차려져 있긴 하다, 늦게 일어나서 다시 치워져서 그렇지)


청소기 소리에 눈을 비비면서 엄마, 조금만 더 잘래. 하면 그래라 하고 퉁명스럽게 얘기하고 위이이잉 소리로 아침을 깨운다. 이제 나는 삶의 피로가 체력을 이겨버리는 나이가 됐으므로, 10대 때처럼 아, 엄마! 시끄럽다고! 하면서 화내지 않는다. 그냥 에이 시끄럽다 싶으면 이불을 덮고 관심을 끄면 더 잘 수 있다. 엄마와 지내는 것은 조용하던 일상에 소음이 들어온 것과 같다. 전화통화로도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스피커폰도 아닌데 왜 엄마는 거의 고함을 지르면서 통화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건 나는 엄마가 저기 있구나, 하고 잘 수 있다.     

엄마... 무슨 5박 6일 있는 것처럼 설명서를....

엄마는 내 집에 오면 항상 불안한 눈초리로 집을 먼저 훑는다. 딸과 사위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 아니면 살림살이를 다루는 딸 부부가 미심쩍음인지 일단 짐을 툭 던져놓고 엄마는 이리저리 집을 살핀다. 정리가 안 된 아이 장난감이 있으면 엄마의 기준으로 착착 정리해 둔다. 그래서 나중에 아이와 내가 못 찾기 일쑤지만. 어쨌건 엄마가 한 번 왔다 간 집은 정리정돈이 되어있다.     



최근에 트위터의 우스갯소리로 “엄마 없인 살 수 없지만, 엄마랑은 못살아”라는 글을 보고, 끄덕끄덕했던 기억이 났다. 언제나 엄마의 마음에 꼭 맞고 엄마를 만족시키는 딸로 살고 싶지만, 과음했던 어제의 몸뚱이가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스무 살 이후로 엄마랑 오랜 기간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엄마 집으로 내려가서 스물네 살 즈음 딱 반년, 대학교를 휴학하고 약 반년 간 엄마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 한번 진탕 술을 먹고 필름이 끊겼던 적이 있다. 엄마가 나를 보던 안쓰러운 시선이 아직도 기억난다. 물이 머리맡에 놓여있었고, 이불은 반만 덮여있었다. 항상 집에 있을 때는 티브이를 틀어놓던 엄마가 티브이도 켜지 않고 있었다. 술도 마시지 않는 엄마가 술병과 숙취에 찌든 사람이 필요한 걸 알고 딱딱해놓는 게 처음엔 어찌나 신기하든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 그동안 엄마가 숙취에 찌든 아빠를 뒤치다꺼리해 주던 근 30년이 뇌리를 스쳤다. 내 머리맡에 놓여있는 물 잔을 들고 덜 깬 눈으로 망연히 엄마를 바라보는데, 또 얼마나 엄마가 조심조심 조용히 빨래를 개고 있던지. 나는 그 뒤로 엄마에게 시끄럽다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엄마는 너무 오래 조용했고, 또 너무 오래 조용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아빠의 지독히도 자기중심적인 애정을 받아주기 위해 엄마는 항상 자기를 깎아내고 참아내야 했었다. 물론 엄마가 대거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겨우 참다 참다 엄마가 소리를 크게 내는 순간 이어지는 아빠의 한숨, 그리고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으로 시작하는 아빠의 다독임. 갑자기 엄마를 자기랑 다투는 동등한 성인이 아닌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 한 그 태도에 잠을 위장한 채 귀 기울여 몰래 듣고 있던 나는 가끔씩 기함하곤 했었다. 당연히 엄마가 맞받아치면 누가 먼저 화를 냈냐에 대한 무의미한 말꼬리 잡기 싸움들까지. 엄마는 침묵이 금이라는 말을 묵묵히 일상에서 실현해 냈다. 


때때로 오빠가 내뱉는 투덜거림과 내가 종종 주절거리는 원망까지 엄마는 듣고 입을 앙 다무는 일이 많았다. 엄마의 입술이 앙 다물며 양 끝으로 팽팽하게 평행선을 그리면, 그건 이른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어차피 말해봤자, 어차피 얘기해 봤자.  




엄마는 나와 오빠로부터, 아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서 좀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항상 이마 미간의 주름을 걱정하던 엄마는 이제 눈가나 입가의 주름을 걱정하는 편이 더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직도 큰 소리에는 깜짝 놀라고, 과거의 일을 종종 기억하지 못하며, 그때 그럴걸, 그때 그러지 말걸 하는 후회와 되새김이 잦다. 나는 그때마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럴 수 있지, 하는 반은 비었고, 반은 대충 흘려하는 무의미한 말들로 최대한 엄마의 마음에 공감하지 않으려 애쓴다. 엄마는 내가 기억하는 매 순간 적어도 본인이 할 수 있는 한에서, 그리고 아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웃는 얼굴은 너무 소중하지만 초상권은 더 소중하니까 얼굴을 한번 가려본다.


장모님, 와이프 술 먹으면 맨날 저렇게 많이 먹어요~ 하는 사위의 어리광 섞인 투정에 엄마가 그러게 잉, 징하네,한다. 물 마시고 정신을 겨우 차려 장모님 좋아하신다고 사위가 직접 만든 크림파스타를 몇 숟갈 뜨다 만다. 치즈와 우유를 어지간히도 부어놔서 속이 메슥거린다. 엄마는 어지간히 먹제, 하고 낮게 타박을 하고는 손 큰 사위의 요리를 맛있다면서 묵묵히 먹는다.


그리고 아직도 숙취로 고생하는 딸의 손 앞에 말없이 찬물을 떠놔준다. 

엄마의 입모양이 평행선을 그렸는지, 곡선을 그렸는지는 술에 찌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엄마랑은 못살지만, 엄마 없인 아직도 살 수가 없다.      



엄마가 돌아갔다. 나는 괜히 엄마가 청소기를 돌린 깨끗한 바닥을 더럽히고 싶다. 엄마, 조심해서 가. 가서 전화 줘. 하는 끝인사는 엄마랑 하기에는 아직도 어색하다. 엄마는 그래, 또 언제 볼지. 전화할게. 하면서 헤어지는 인사가 이제 익숙할까.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 엄마가 되었어도, 아직도 우리 엄마의 마음은 아직도 헤아리기가 어렵다. 언제쯤이나 알게 될까.




엄마, 조심해서 가. 가서 전화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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