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잃어버린 것일까 놓쳐버린 것일까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남편이 육아휴직을 썼다.
아이에 대한 일들이 전부 주양육자에게 미뤄졌다.
나는 이제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면 나를 맞아주는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 돌아간다.
마치, 결혼하기 전에, 특히 더 어릴 적에 엄마가 살던 집에 있었던 것처럼
살뜰하게 보살핌을 받고 차려진 밥상에 앉아 그냥 밥을 먹고 설거지통에 그릇을 담궈 놓는다.
아이는 엄마 대신 아빠를 부르는 횟수가 늘었고,
아빠는 아이에게 다가가서 뭔들 아이와 함께 해주려고 한다.
암묵적으로 우리 부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약간 낯은 가리지만, 수다스럽고 활동적이며 사교적이다.
우리의 집결체 같은 이 아이는 이제 더 이상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밖으로 나갈 것이다.
이제 한 걸음 나갈 때마다 우리는 아이를 응원해주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음을 매 순간 매 순간마다 느끼고 있다.
약간은 빈둥지증후군을 오래 앓을 때쯤, 오래도록 친분을 유지해온 절친한 친구가 생각이 났다.
친구는 조금 오래 아이를 준비하고 있었고,
내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잊지 않고 입학 선물을 보내주기까지 한 두터운 친분을 가진 이였다.
또 이미 해외여행이며 국내여행을 자주 가본 터라 친구의 성향도,
내 성향도 알고 있어 부담없었다.
“여행 가지 않을래? 그것도 해외로.”
친구는 흔쾌히 승낙했다.
모임 통장에 돈을 열심히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친구의 부족한 주머니 사정에도 자금은 충분했다.
다만, 여행을 가기까지가 정말 난항이었다.
갑작스럽게 일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마감이 전부 그 여행 이전이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 새벽 2시까지 잠 못드는 일들이 허다했고
그런 와중에도 또 친구와의 여행은 가고 싶었다.
둘만 가는 여행의 총무를 도맡았음에도 진행되지 않는 숙박이며,
여행일정들에 친구는 한 번씩 잘 되고 있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종종 괜찮다, 보다가 하겠다 식으로 내게 최적화된 일정을 찾아가며 억지로 억지로 끌었다.
결국 여행 당일이 돼서야 환전도 안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외여행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은 친구는 조금 불안해했다.
다행히 우리의 여행지는 atm기에서 환전하기 정말 쉬웠다.
다만 atm기의 줄이 길었을 뿐이지.
그러다 숙소로 가는 길을 잃었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던 우리는 결국 지쳐버렸다.
도착한 날, 우리는 정말 말도 못할 정도로 지쳐버렸고 결국 하나씩 하나씩 포기해야 하는 일정들이 늘었다.
결국 여행의 첫날 밤 친구는 울었다. 너무 힘들었다며.
덕분에 그동안 가족들과 함께 한 여행 일정이 얼마나 내 위주로 맞춰져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열정이 넘친다는 말로 감싸졌었지만,
실은 내가 원했던 시간만큼만 할애하면서,
재정적인 부분은 살짝 눈감아가면서,
지극히 내가 원하는 만큼만 사용하는 여행이 얼마나 내 위주의 것인지도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살짝 가려져 있었던 충동적이고 즉각적인 선택들이,
다른 이와 함께 했을 때는 불안과 미확정의 연속으로 이어져
얼마나 다른 이에게 불안감을 주는지를 목격하고야 말았다.
그 마지막 날, 야경을 보러가자던 나는 내려놓고 친구와 많은 대화를 했다.
친구는 다정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얘기를 했다. 내가 얼마나 멀어진 것 같았는지.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나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울어진 애정을. 그
럼에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어야 했는지.
또 최근의 자기가 아이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과 너무 힘들어서 어그러지던 꿈들도.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고, 아이와 즐겁게 보내는 시간만큼
틀림없이 누군가에게는 소홀해지게 되어있다.
나의 10대, 20대의 일부분이던 친구와 멀어지는 걸 나도 느끼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너무너무 바쁘다는 말로 중요한 것들을 내려놔 버리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속도에 놀라
누군가 브레이크를 걸어줬으면 하던 상황에 친구와의 여행은 내가 놓친 것들을 깨닫게 했다.
아이가 점점 사회적인 자아를 찾아가듯이,
나도 이 행복하고 꿈결 같았던 시간들을 마음 깊숙한 곳에 든든한 내 하나의 자부심으로 묻어두고
소홀했던 내 사람들에게, 특히나 가장 소홀했던 내 자신에게 재충전의 시간이 왔다고.
친구와 눈물 섞인 대화를 하면서, 나는 이제야 친구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친구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도.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등교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좀 더 홀가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슬쩍 내 뒷모습도 한번 거울에 비춰본다.
슬쩍 출근하는 길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며, 내게서 멀어지는 아이의 등을 보며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