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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니기리상 Aug 10. 2021

Prologue :: 나의 일기

상실감을 일깨우기, 잊지 않고 기억하기.

 

우리 같은 사람들 - 그 많던 일기는 그저 글자가 되고



 나는 일기 쓰기를 참 좋아했다. 좋아함을 넘어 삶의 아주 커다란 일부였다.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들은 학년별로 모아 펀치를 뚫어 링에 끼워두었다. 엄마의 펜트리 안 수납박스에 잠들어있는 그것들은 족히 스무 권은 넘을 것이다. 학창 시절엔 늘 들춰보던 나만의 보물이었다. 인과관계도 가끔 어긋나 있고, 때로는 너무 예민했거나 무심한 하루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감정들을 내 일기장은 고스란히 껴안고 있다.


 중학교 때까지의 나는 일기를 안 쓰고 자면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채로 잠들곤 했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나는 일기를 쓰지 않은 그다음 날이 되면 전날의 24시간을 살아온 내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불안했다. 매일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강박처럼 나를 옭아매었다. 단순히 일기 쓰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 뿐인데, 하루의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고작 중학생이 그런 걸 제대로 알리는 없었겠지만. 어리석을 만큼 순수했었나 싶어도, 최소한 일기에 대한 마음가짐은 매일 핑계를 대며 미루는 지금보다는 훨씬 성숙한 진심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기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되면서, 나는 이런 개운하지 못한 하루를 30대 중반을 훌쩍 넘기고 있는 지금까지도 계속 흘려보내고 있었다. 일기를 쓰지 않은 수년간, 어느 날 문득 몇 개월의 의식 없는 잠에 빠졌다 깨어난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허망함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그런 세월 속에서 결국 오늘의 한비는 어제에 비해 얼마나 성숙해졌는지를 잊었고, 오늘의 나는 오늘보다 젊고 건강했던 어제를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상실감을 주는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왠지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를 기억하는 일을 어찌나 방치했던지 지금으로써는 빨리 깨닫지 못했던 어제가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10년 전부터라도 다시 일기를 썼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달라졌을까, 를 생각해보니 그랬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상상해본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공책을 준비해두고 (푸른 계열, 꽃문양과 에스닉한 문양이 뒤섞인 빈티지함이 가득 묻어나는 그런 공책. 어딘가에 있을까 했는데 얼마 전 딱 그런 공책을 찾았다!) 펼치면 어딘가 조금 거친 느낌의, 마치 저렴한 공책에 사용되는 크라프트지로 제본된 공책이면 더없이 좋겠다. 표지를 넘기고 엮인 종잇장 사이를 꾹꾹 눌러 편다. 정말, 어떤 책이든 첫 장을 펼칠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그 감각이 있다. 앞으로의 다음 장은 눌러 편 골짜기를 따라 넘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첫 장은 반듯하고 신중하게 공책의 아래부터 위까지 세심하게 눌러 펴게 된다. 어떤 일이든 시작이 중요함을 이 순간에도 소소히 깨달으며 다음 과정을 떠올려본다.



인디고 노트와 에스닉한 문양의 작은 노트는 두 번째 인도에서 구매했다. 달이 그려진 노트는 와디즈 펀딩으로 받은 반 고흐 갤러리 북의 사은품이었다. 너무 예쁘잖아요!


 그리고는 맡아보는 새 종이 냄새. 날짜를 먼저 쓰고, 무엇을 쓸지 잠시 고민해본 후 떨리는 첫 발을 뗀다. 펜은 역시 모나미 볼펜이나 연필이 준비되어 있다. 소박하고 사각거리는 그 느낌이 좋다.

 

 이제 숨을 고르고 한 글자씩 꾹꾹 눌러써보는 그날의 일기.

 볼펜이 잘 나오지 않아 몇 번이고 긋다가 빗나가버린, 연필로 쓰다 지워 잘못 눌러쓴 흔적이 남아있는, 나에게마저 숨기고 싶었던 흔적마저도 역사로 만들어 줄 사명감을 가진 나의 일기장.

 그렇게 다시 새로이 만나는 나, 반갑다. 잘해보자!



잔잔한 나의 일상 속 바람이 불어 닿았죠
바람은 파도를 만들어 시도 때도 없이 일렁거리네

- 그 많던 일기는 그저 글자가 되고,
  우리 같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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