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30일 에세이 스물다섯 번째.
몰입의 순간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무아지경의 순간 나를 잊은 행위만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해결되지 않던 고민을 떨치려 그림 그리기에 몰입하던 순간이 있었다. 일과를 마치고 작정하듯 붙들어 새벽녘까지 이어지던 그 시간만큼은, 그저 그리는 내 손과 그리기 위한 백지만 있었다. 무엇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조차 잊은 채, 종이를 펼치자마자 손을 움직이는 행위에 나의 온 정신을 내맡겼다. 유학 중이던 곳의 현지인 연구원에게 김치 냄새난다는 핀잔을 들었던 순간도, 생활비가 다 떨어져 가서 엄마가 보내준 떡과 고추장에 학교에서 가져온 일회용 설탕을 넣어 떡볶이만 해 먹었던 며칠간의 삶도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진 채 그림만 그렸다. 서러움도, 질투도, 미움도 없었다. 완벽하게 사라진 나의 정신 속에서 내 행동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와중에 마음속에서 파도처럼 휘몰아치던 고민은 내가 좋아하는 행위에 몰두할수록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히 사라졌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리는 동안의 ‘시간’이었다. 무아지경 속 문득 정신이 들어 잠시 그림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드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서너 시간이 사라졌었다. 그 사이 평생 나를 괴롭힐 것만 같던 불상사들은, 계곡물처럼 휘몰아치며 흘러가던 시간의 결 속에 빠른 속도로 묽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몰입을 연속적으로 겪으며 불안과 권태를 털어내던 중 문득, 건강한 몰입의 시간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마음의 훈련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무의식중에 이미 몰입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실연을 잊기 위해 더 바쁘게 살아가려 애쓰기도 하고, 힘든 일과를 보낸 후 보고 싶던 드라마나 영화에 집중하는 동안 하루의 피로를 흘려보내고 안정을 되찾으며 잠자리에 들기도 하니까 말이다. 힘든 순간은 언제고 끝이 있지만, 한시라도 빨리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본능적인 몰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