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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강주 Mar 18. 2023

갑자기 나를 책임지는 이야기

20220703



아침 일찍부터 약속이 있었던 나는 오늘 집에 돌아오면 낮잠을 자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어제 친구와 즐겁게 놀았던 테이블의 흔적이 보였고, 오늘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서 산 포스터와 엽서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책상을 치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어디선지 힘이 나서 와인잔을 닦고, 포크를 닦고, 도마를 씻는데 갑자기 겸사겸사 빈 김치통에 새 김치를 썰어 넣자는 생각이 들어서 도마의 물기를 대충 닦아 김치를 채워 넣었다.


요즘 집에서의 가장 즐거운 행사는 낮에 창문을 열어놓고 친구가 준 인센스를 켜놓는 일인데 - 생각해 보니 지금처럼 밝은 낮에 인센스를 켜면 저녁까지 은은하게 향이 남을 것 같아 부리나케 켰다. 그리고 나서 큰 김치통에 있는 김치를 다 꺼내자 갑자기 냉장고에 있는 애매하게 남은 딸기 생각이 나서 키위 2개와 딸기 6개를 도마 위에서 툭툭 썰어 껍질과 대가리만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또 이전에 버리지 못했던 키위와 단무지 따위가 생각이 났다. 3개월 전 즈음에 미처 먹지 못한 식빵 한 조각이랑, 피클이랑, 마라탕 땅콩 소스 같은 것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김장철에 이모랑 엄마가 준 잡채도 조금이 남았는데 열어보니 상한 냄새가 났다. 내가 너무 맛있다고 유난을 떨어서 엄마 아빠가 한 번을 더 가져다준 건데 책임감 없이 버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코로 숨 쉬는 것을 참으며 그것들을 봉투에 다 담았다.


'너무 역하다.. 역하다. 역하다..' 구토가 밀려왔지만 뭐 어쩌겠나, 내가 먹겠다고 받아놓고서 구역구역 모아둔 것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제때제때 신선한 모양새였을 때 버렸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냉장고에 먹을 수 있는 것들만 남아있는 상태가 되었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냉장고를 비웠더니 갑자기 일주일치 빨래가 밀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입고 있던 옷을 집어던지고 빨래를 돌리기 시작했다. 집에 왔으니 일찍이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밥을 지었다. 한 끼 양만 해야 할까? 아니다, 앞으로는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밥을 먹을 거니까 최대한 많이 하고, 소분해서 얼린 다음 간간이 먹으면 좋을 것이다. 쌀을 5컵 정도 꺼내어 정갈하게 씻고 생수를 들이부어 밥을 했다.


나는 나를 책임진다. 나는 나를 먹인다. 나는 나를 씻긴다. 나를 위해 청소하고, 나를 위해 구매하고 나를 위해 소비하며 나를 위해 생계를 꾸린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해외에서도 해본 일이고, 지금은 보다 좀 더 편한 한국에서 돈도 벌고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오늘 저녁을 조금 일찍 차리자. 내가 저녁을 맛있게 먹을 거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면 나는 나를 위해 설거지를 하고 따뜻한 커피를 타고, 미리 씻고 썰어놓은 과일을 먹이며 티비를 틀어줄 것이다. 빨래를 돌려서 밥을 먹기 전에 빨래를 널자. 그러면 나는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고 내일 기분 좋게 양말을 신을 수 있겠지.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또 하자, 또 하고 분리수거를 하자. 분리수거를 하면 깨끗해진 부엌을 보고 내 산뜻한 기분이 이틀은 지속될 거다. 분리수거를 하고 와서 샤워를 하자.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해지면, 티비를 보면서 딸기를 먹을 때 얼마나 내가 행복해할까? 내일 아침에 조금 더 자도 되어서 얼마나 행복해할까?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나를 슬프게 만드는 건 타인도 나도 가능한 일이지만,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나를 행복하다고 속일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나한테 잘 보여야 한다. 부지런히, 꾸준하게.


불안한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나는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이 안 좋은 생각을 한다. 아주 고약한 취미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절망이 보편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당장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속이 새까맣게 탈 것 같을 때는 친구에게 무턱대고 말을 걸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읽기도 한다. 나는 결국 지구에서 태어난 거대한 생명의 연결 고리 속 하나의 실타래일 뿐이다. 내 선에서 끊길지 아니면 그다음 실을 뽑아낼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나 같은 인간이 수십 수만 명이 있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가진 고통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내가 부정당해 슬프다기보다는 역시 나 따위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의 무게가 한결 덜어진 느낌이 들어서 위안이 된다.


나는 그래서 글을 쓴다. 기쁜 일이든 서글픈 일이든 슬픈 일이든 화가 나는 일이든 간에, 도대체가 생각 없이 살 수 없는 뇌라, 어떻게든 다른 데에 적어두지 않으면 내 머리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요즘은 한 동안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막연함으로 내가 나를 싫어하기만을 반복했다. 내가 나를 챙기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외로움과, 내가 나를 위해 청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내 방을 싫어하고 내가 나를 제대로 먹이지 않았기 때문에 배달음식을 해 먹고 폭식을 하는 악순환의 굴레가 반복됐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내가 나를 잘 챙긴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무분별하게 자지 않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잠실나루역에서 강변을 향해 달리는 2호선에서 한강에 비치는 햇볕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나랑 평생 함께할지도 모르는 이 불안함을 그저 건강한 20대라면 겪는 평범한 청춘의 아픔 따위로 치부할 거다. 나는 나를 책임진다. 나를 책임지는 것으로 시작하여 - 건강한 삶을 살고,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거다. 그렇게 늙어가며 아름답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 그래서 나를 기억했을 때 사람들이 기분이 나아질 수 있는.. 그들이 막연할 때도 나를 떠올리면 적어도 한결 기분이 평안해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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