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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강주 Mar 19. 2023

갑자기 양재역을 지나치는 이야기

20201018

옛날에는 버스 타기를 싫어했다. 횡단보도 하나 안 건넜다고 정반대의 목적지를 향하는 게 어쩐지 무서워서 꼭 지하철을 타고 다녔지. 그러다 혼자 제주도에서 17일을 지내고 나서는 버스가 좋아져서 매주말 아르바이트를 광화문 거리를 가로지르는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시위하는 사람들, 한복 입은 관광객들과 실구름뿐인 푸르고 광활한 하늘, 산과 자연과 가로수들, 그리고 교보문고의 커다란 광고판 따위들을 보면 내 가슴도 괜스레 같이 설렜다. 난 여전히 지하철이 더 편한 사람이긴 하다만 한적한 평일이라면 기꺼이 버스를 타고 싶다. 이 글은 어제 버스를 타고 집에 왔기 때문에 써본다.


어제 아침은 9도로 쌀쌀했고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려 했지만 버스정류장에 가보니 다음 차가 오는 데 17분이나 남았다고 하기에 지하철을 탔다. 버스가 좀 더 뺑돌아가는 루트였으므로 시간을 넉넉하게 계산해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섭섭한 마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지나치게 빨리 도착해 버린 서울의 골목에서 나는 커피와 초콜렛을 들고 서 있었다. 가끔은 평소와 전혀 다른 곳에서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다양한 타인의 삶을 관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경험이다. 고등학교 앞의 버스정류장 광고판에서 재수학원 추천글을 보고 학구열을 추측해 본다든지, 이른 아침에 자가용을 이렇게까지 격하게 몰고 화내는 운전자를 보고 놀라고, 8시 반이었는데도 카페에 가득히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감탄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곳을 방문한 다양한 가족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그려본다. 절대 멋대로 상대방의 삶을 추측하고 재단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일회성인 만남이 업무로 반복되는 곳에서는 이런 재미마저 없으면 앉아만 있는 8시간이 너무나 퍽퍽하므로, 다양한 상상을 곁들여본다.


5시 10분에 다시 밖으로 나와 샛 노랑색의 빛이 - 분명 빌딩 숲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해질녘의 시간엔 지고 있는 해가 내 옆에 서 있는 듯 온 골목이 뻥 뚫려있는 것만 같았다 - 내 시야를 가득 채웠고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버스를 타러 도망갔다. 지하철을 타면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거리를 굳이 30분이나 더 진득이 앉을 각오로 버스를 탔다. 버스기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리를 올릴 수 있는 뒷바퀴 위 자리에 앉아 창문을 연다. 해가 빌딩유리창을 비추어 옆 건물에 반사되고 푸른색 페인트 칠이 된 아파트에 주황빛이 산란되어 기둥 옆 그림자가 연두색 즈음이 된 것을 보는 것들이 즐겁다. 이 시간대의 서울은 주말이고 자시고 참 차가 많구나 하는 잡념들을 머릿속에서 혼잣말하듯 내뱉으며 멍하니 앉아만 있다.


대학교 강의로 서양음악사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피아노전공을 한 남강사가 본인의 첫 강의임을 티 내며 열정적으로 수업을 한 것이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다. 언젠가의 레포트에 내가 "악기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달리 구분하기가 어려워 연주자의 특징을 간파하기 어려운 것 같다"라는 문장을 적어내자 빨간펜으로 "악기 연주자 또한 구분할 수 있습니다!"라고 지적 아닌 지적을 한 그 강사는, 물론 나에게 낮은 점수를 줬지만, 수업을 열심히 한 멋진 사람이었다. 다양한 피아노연주자에 대한 설명을 하던 중 사실 공연 때에는 악보만을 넘겨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프란츠 리스트라는 연주자가 악보를 통으로 외워 연주하기 시작한 이후로 많은 연주자들이 악보를 외워야만 했다고 웃으며 프란츠 리스트를 악마라 칭한 것도 기억난다. 양재를 지날 때에 나는 List라는 이름을 가진 옷가게를 보고 그때의 기억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빨간펜으로 지적을 당했던 기억도, 같이 강의를 듣던 친구와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회를 봤던 기억까지. 기억의 링크는 이렇게도 뜬금없어서 나는 같은 24시간의 하루를 지내도 몇 년을 걸쳐 사는 것만 같아.


리스트 옷 가게를 지나고 잠시 잡념에 빠진 사이 양재역 5번 출구 옆에 있는 KFC가 보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방금 옷가게를 보고 몇 년 전 일을 기억해 낸 것처럼, 양재역 5번 출구에 KFC가 있다는 걸 나는 기억해 낼 수 있을까? 누군가와 만날 일이 있을 때, '양재역 5번 출구로 나가면 KFC가 있는데 거기서 만나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나는 그날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날 버스를 타며 봤던 수많은 자동차와 창문 사이로 들어온 머리가 차가워질 정도로 추웠던 바깥바람과 아주 사납게 난폭운전을 했던 기사와 이 모든 잡념들까지도 기억할까? 과연 기억은 나를 어디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마스크를 쓰고 버스에 오래 앉아있는 것이 힘들어 좀 더 걸을 요량으로 집에서 조금은 먼 정류장에서 내려걸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걸으며 다시 한번 감각들을 새겨 넣었다. 요즘 하루하루는 별로 즐겁지 않았는데, 어쩌면 오늘은 조금 즐거웠던 것 같다고, 이런 날들은 좀 더 기억 속에 뚜렷하고 강렬하게 남아있으면 좋겠다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언젠가의 나는 양재역 KFC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어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제의 내가 없었던 것처럼, 그때의 내가 고민한 것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까, 당연한 것이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 그래도 어떤 날들은 지극히 평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오래 기억에 남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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