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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강주 Apr 14. 2023

베를린에서

<8>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타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사회에서 포용될 수 있을까? 아니, 포용되는 것은 중요치 않다. 내가 포용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가 포용할 수 없더라도 나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사실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며칠간의 크고 작은 인종차별들을 겪고 나서, 나는 내 존재에 대해 계속 고민하기 시작했다. 흔히 한국에서는 여자로서의 삶을 불평하며 ‘탈조선’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겠지만 – 내 아버지나, 내 사랑하는 남동생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 – 그렇다고 해서 그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며, 그 불평등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것 또한 더더욱이 아니다. 아무튼 지간에, 내가 하려는 말은 조금 우울한 이야기다. 평생을 이 피부와 모발, 얼굴을 가지고 이 성별로 살 것이라면 사회적 약자로서 겪는 이 문제는 우리가 조선을 탈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고, 낯선 사람이고, 아시안이고, 눈이 째진 동북아시아인이고, 여성이다. 물론 껍데기에 상관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우리를 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착한 소수의 사람들은 한국에도 존재한다. 나는 뭘까? 나를 규정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전에는 내 이름 석 자와 나이, 가정환경과 학벌 정도를 말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국적, 만 나이, 내 모발 색, 내 눈의 모양, 내 체형과 식습관 화장하는 모양새나 웃을 때의 모습, 거절하는 태도까지 모두 ‘나’라는 사람을 분류시킬 때 쓰인다는 것도 알게 됐다.

 

*

 

여기에서 의지하는 몇 안 되는 어른이 있다. 어른이란, 내 부모 또래의 중년이고 내 이야기를 경청해 주고 좋은 조언을 주는 사람을 말한다. 나도 사전적 정의로 따지자면 어른에 속하긴 하지만,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의지하는 어른 한 명은 U, 다른 한 명은 독일어 학원 선생 J이다. 그는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모르는 것이 없고 사회적인 이슈들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 많은듯하여 속으로 많은 의지를 –남몰래- 하고 있었다. 내가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자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다음날 자원봉사를 지원할 수 있는 웹사이트 목록을 인쇄해 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내 부족한 독일어 실력을 고사하고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 J, 저는 이 학원을 좋아하지만 때때로 인종차별을 느껴요. 그건 저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자 그는 당황한 얼굴로 ‘내 수업에서 말이니?’라고 되물었다. 아니요, 수업에서는 그런 일을 느끼지 않아요. 다만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죠 …. 내 이야기를 들은 선생은 고민을 하더니 나에게 영어가 편한지 독일어가 편한지 물어봤다. 영어가 더 편하다고 하자,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차별이 뭐라고 생각하니?’

- 타인과의 차이점을 이상하고, 나쁜 것이라 여겨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이요.

‘맞아. 그런데 그 아이들이 너에게 질문을 한 것이 차별이라고 생각하니? 그 아이들은 그저 너에 대해 호기심이 있었을 뿐 아닐까?’

- 물론 타인종과 타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저에게 질문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 이전에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어디서 왔는지 예의 있게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래. 하지만 그 아이들은 분명히 아시아, 특히 일본과 중국과 한국이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을 거야. 그 아이들은 아시아에 대해 무지해서 그런 거야.’

 

나는 이즈음에서 선생이 왜 이상한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 J,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와 제 친구들에게 질문을 했던 남자들은 중동아시아 애들이었어요.

 

*

 

선생은 친절했다. 표정이 조금 굳긴 했지만 나에게 이런 무례한 일을 겪을 때 네가 힘을 내서 한국에서 왔다고 당당하게 말해보라고 조언했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말이 안 되는 것을 아는지 재차 번복했다. 아니, 그래, 네가 무기력해지는 것도 이해한다, 너에게 인종차별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번 그렇게 대할 순 없겠지, 다만 네가 무기력해지거나 슬픔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학원에 어떤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해 볼까?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교실을 떠났다. 선생은 분명 좋은 사람이다. 유식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아는 선한 사람. 백인 남성으로서 본인의 지위를 자각하고 인종차별을 하지 않으려 경각심을 갖고 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모든 지식을 통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릴 수 없다. 아무리 많은 글을 읽었다 할지언정, 활자와 지면 너머로, 혹은 그가 배운 것 이상으로 모든 것을 깨우칠 수는 없겠지. 예를 들면 백인들만 아시안 여성에게 인종차별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과, 그 빈도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고, 종류도 다양하다는 것들. 선생은 나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졌던 사내들이 스위스나 프랑스 출신의 백인 애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어딘가 이 문제가 우스워 보여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

 

나는 종종 그런 것에서 사랑을 느끼곤 한다. 다 큰 딸의 흰 운동화를 언제까지 챙겨줘야 하냐며 구시렁대던 소리를 뒤로 하고 외출한 다음날,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나가려고 본 신발장에는 내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을 뿐 아니라 끈이 정갈하게 매여진 상태로 날 기다리고 있을 때. 분명 신발끈을 다 빼고 빨았을 텐데도 내가 그 신을 신고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신발끈은 하나하나 꿰어져 있었다. 혹은 며칠 내내 하릴없이 집에서 놀고먹는 딸이 며칠 잠을 통 못 자고 죽은 사람의 얼굴을 한 채로 무기력해지자 같은 방을 쓰는 동생이 일어날 시간에 언니 깨지 않도록 조용히 하자고 하는 속삭임이나, 1층 침대를 알록달록한 색동 수건으로 햇빛을 가려주는 따스함에서. 오늘은 해바라기 할까? 라며 웃는 둘을 보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물었을 때 “그냥 공원에 앉아서 해나 멍하니 보자는 뜻이야.”라는 예상치도 못한 귀여운 둘만의 은어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런 순간들을 사진으로 기록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종 꺼내보며 지금까지 살아온 순간을 두 번만 더 버티면, 좋든 싫든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위안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물론 돌아가면 또 미친 듯이 싫겠지. 지금의 나를 곱씹으며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그때 복에 겨웠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건 끝이 예정된, 평소보다 좀 더 긴 여행일 뿐이다.

 

*

 

엄마는 일을 마무리할 때마다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여행은 일상을 떠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그 끝에는 우리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고.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 더 값진 것이라고.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만질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

 

네 목소리엔 총알이 장전되어 있고

내 가슴은 텅 비어 있어서 북으로 쓰기 좋지

 

그래서 네가 말할 땐 총성이 울려 퍼지고

내 가슴을 내리치면 듣기 좋은 소리가 나지

 

내 가죽을 벗겨내고 무두질을 해 멋진 북으로 만들어줘

힘껏 내리쳐 봐, 속이 텅 비어서 좋은 소리가 날 거야

 

총성이 울리는 날에는 가끔 그게 북소리인지

가끔 누군가 북을 치면 그게 총성인지 하고

 

헷갈리는 때가 있지, 있지만

분명 듣기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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