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방송통신대 농학과에 합격했다

2024-02-24

by 정원

사실 모르겠다. 이게 과연 내 인생을 얼마나 바꿀지. 합격을 못할 이유가 없으므로 지원을 하면 합격할 거라고 예상했고, 역시나 합격이다. 농학과라는 단어와 내 이름이 나란히 적힌 합격자 화면을 보는데 아주 아주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합격이라서 좋은 것도 잠시. 왜 기분이 더 가라앉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키보드를 꺼냈다.


이 기분은 부담감에서 온 것 같다. 그렇다. 40대. 정말 오랜만에 하는 공부다. 학교를 다닐 2년이라는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지고 그 기간 동안 내가 포기할 것들이 뭘까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안다. 2년이라는 시간이 금방이라는 것을. 올해만 지나면 2학기가 남을 것이고 그건 곧 끝날 것이다. 4년도 아니고 2년이다. (나는 3학년으로 편입했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나는 농학에 이렇게 까지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식물에 이렇다 할 만한 관심이 없었는데 왜 생각이 달라졌을까? 이를테면 등산을 하면서 누군가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나는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울창한 숲과 나무를 정말 사랑하고, 사랑하면 알고 싶어 지지만,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나무가 얼마나 많은가. 들은 정보는 이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가 전공자도 아니고…’라는 생각도 있다. 내가 이제 와서 나무에 대한 지식으로 업을 삼을 수도 없는데 이런 걸 기억해서 무엇하나. 물려받은 산이 있어서 나무를 키울 것도 아니고.


이와 달리 농업 내지 조경은 호기심이 가는 영역이었다. 생활 속에 가까이 있어 친숙한 것도 있다. 잘 가꾸어놓은 텃밭이나 정원을 보면 감탄하고, 이렇게 예쁜 공간을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나도 예쁜 정원을 갖고 싶었다. 필명이 정원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살면서 마음 언저리에 맴돌던 생물학 대신 차선으로 선택한 농학과. 이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제 나는 농학과 학생이다.


살면서 여러 가지가 늦었다. 연애가 늦었고, 그래서 결혼이 늦다. 공부가 늦었다. 한창 공부를 할 나이에는 공부를 집중해서 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다시 공부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니, 진작부터 공부는 하고 싶었다.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이라는 질문에 ’ 유학을 가고 싶다 ‘라는 말을 누군가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네 싶어 반가웠던 적이 있다. 그런데 현실은 생활을 위한 돈을 벌기에 바빴다.


농학과가 있다는 걸 일찍 알았다면 진작에 도전했을 것이다. 저렴한 등록금에 (한 학기 등록금과 전공책값을 더하면 50만 원 정도다) 집에서 강의를 들으면 되고 학위를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최근에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고, 고민에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았다. 생물 관련 다른 과가 몇 개 있었다면 그랬겠지만 생물을 다루는 학과는 농학과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농학을 공부하면 연구를 해보고 싶다. 연구라고 해서 거창한데 이를테면 스마트팜이라고 했을 때 작물을 재배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작물을 잘 키울지 자료를 찾고 골똘히 생각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그런 일이라면 흡족할 것 같다.

만약 농학을 공부했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해도, 식물 관련 분야 중 나에게 맞는 다른 분야가 어디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농업을 공부하고 보니까 조경에 관심이 더 간다면 조경을 배워보면 될 일이다. 실내 식물인테리어에 관심이 있고, 앞으로 그쪽 시장이 수요가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땅을 구해서 내가 먹을 채소를 심고 길러서 살고 싶은 로망이 있다. 그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토양에 대한 이해, 비료에 대한 이해, 작물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농학에서 그것을 배울 것이므로, 내가 지금 허투루 일을 벌이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럼 되었다. 농학이 쉬운 분야라고 생각하고 뛰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자동화될 가능성이 높다. 생각은 이쯤 해두고 우선 재학을 하고 졸업을 잘하자.


합격자발표날을 앞둔 며칠 전, 나는 그동안 만들어둔 잔가지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제 농업이라는 굵고 큰 가지가 뿌리를 뻗을 자리를 마련해야 하니까. 인생을 심플하게 만들어야 중요한 한 두 가지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가던 모임도 아쉽지만 가지치기가 예정되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침목도, 혹시 모를 인연을 만날 기회도 내려놓기 힘들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 부업으로 배우려고 산 사진 관련책을 버렸다. 그림책 작가들의 인터뷰집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처분했다. 더 처분할 책이 있는지 살펴보아야겠다. 이사 올 때도 버리지 않은 책들이다.


이 과감성이 어디서 나왔을까? 농학과 입학에서 나왔다. 이제 내가 이길로 갈 것 같으니까, 아니, 갈 사람이니까. 내 백그라운드는 식물이 될 거니까. 그 외 발을 담갔던 분야들이 이제는 덜 중요해진다. 내 분야가 아닌데 하나라도 배워보려고 했던 노력들. 이제는 이런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계산이다.


주문한 전공책이 책장 하나를 채울 것이다. 이직을 할 때 이력서에 방송통신대 농학과 재학 중이라는 문구를 적어 넣어야지. 내가 나이 8살만 젊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다. 60세가 아닌 게 어딘가. 이제 나는 ‘살아있는 것‘을 공부하는 사람이다. 기분 좋은 긴장이다. 설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의류매장에는 미세 플라스틱이 떠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