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왜 당당한가

by 호하은
인간은 결코 고양이를 '소유'할 수 없다.


나는 아침마다 거울 속의 나를 설득하느라 진을 다 뺀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수익도 내지 못하는 이 육체에 왜 또 커피를 부어 넣어야 하는지 해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에게 매일 일정한 생산성을 독촉한다. 이런 피곤한 인생에서 내가 유일하게 항복을 선언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고양이다. 놀랍게도 고양이씨는 이 집에서 가장 당당한 주주권을 행사한다.


고양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지독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존감을 지킬 방도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양이는 우리 삶의 뒤틀린 궤도를 수정해 줄 가장 가까운 ‘반면교사’다. 무엇을 생산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완결된, 이 지독히도 비자본주의적인 생명체에게 우리가 목을 매는 이유는 그들이 도무지 '협상'이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설득되지 않는다. 무엇을 생산하라고 강요하거나 성과 지표를 들이밀며 다그칠 수도 없다. 그들은 오로지 홀로, 유유히 존재하며 놀라울 정도로 당당하다. 고양이는 전쟁이 나도 제 루틴에 맞춰 몸단장을 할 것이며, 인간을 곁에 두되 자신의 감각을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들면 즉시 거절하고, 아플 땐 홀로 침묵하며 회복을 기다린다.


냉정히 말해 인간은 결코 고양이를 '소유'할 수 없다. 그리고 가질 수 없는 존재는 언제나 강력하다. 이건 단순히 집사의 주책바가지 같은 감상론이 아니다. 고양이를 보며 그저 ‘귀엽다’는 효용에만 젖어 있는 건, 사실 자기가 고양이를 소유하고 있다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착각이다. 생명조차 ‘귀여움’이라는 서비스 자산으로 취급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행복해지는 법을 영영 배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워 있는 사람을 참지 못한다. 마치 그가 우주 정거장의 궤도를 이탈시킨 중범죄자라도 되는 양 사납게 눈을 부릅뜬다. 또한 무엇이든 손에 넣으면 반드시 그만한 '본전'을 요구한다. 나 자신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라는 자원을 끊임없이 가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내 무기력의 바탕에는 “이 자원은 왜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하는가?”라고 다그치는 가차 없는 독촉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워 있는 고양이는 어떤가? 세상은 그 게으름을 당연하게, 심지어 우아하게 받아들인다. 솔직히 같은 생명체로써 이건 좀 불공평하지 않은가?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실존적 불만을 제기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억울한 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애니메이션 《소울》에는 뼈아픈 우화 하나가 등장한다.


바다에 가고 싶어 하는 어린 물고기가 나이 든 물고기에게 묻는다. "바다라는 곳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그러자 나이 든 물고기가 무심히 대답한다. "바다? 네가 지금 있는 이곳이 바로 바다란다." 어린 물고기는 기가 찬다는 듯 쏘아붙인다. "여기는 그냥 '물'일 뿐이잖아요! 내가 원하는 건 '바다'라고요!"


그 어린 물고기는 나였다. 고양이와 나의 존재 양식이 다르다고 믿으며, 한평생 바다라는 거창한 성취만을 갈구해 온 것이다. 실상은 이미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그저 '물'이라며 폄하해 온 사실을 인정하기란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고양이가 창문 너머로 바깥을 감상할 때, 슬며시 그 곁에 동참해 보곤 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누구와도 협상하지 않는 시간.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기' 위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해야 한다. (항상 그럴 수 있는 건 깨달은 성자나 외계인 정도일 것이다.) 보통의 인간이 이런 존재론적 자각을 단 5분이라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투쟁인지 스스로 대견해해야 한다. 쉼 없이 헤엄치느라 정신없는 이들이 여기가 바다인지 강인지 분간하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나는 여기서 거대한 음모론 하나를 제기하려 한다. 결국 우리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갈망하게 만든 ‘어떤 세력’과 싸워야 한다. 진실은 명확하다. 무능함은 죄가 아니라, 사회가 설계한 가장 세련되고 효율적인 공포다. 우울증이라는 그림자는 이미 우리 곁에 도달해 있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게 하여 우리를 영원한 결핍 상태로 묶어두려는 인위적인 정신적 농간일지도 모른다.